김관선 목사(주필)

꿈은 이루어진다. 좋은 꿈은 그렇다. 그러기에 이루어지면 모두에게 좋을 그런 꿈을 품어야 한다. 헐버트 선교사를 설교할 때마다 많이 언급했었다. 특히 그의 꿈! 참 놀랍다. 일반적으로 그를 한국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외국인으로 특징짓는다.

대학 졸업 후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조선의 육영공원 영어교사로 들어온 때의 그의 나이는 스물 셋. 1886년이다. 특히 그의 한글사랑은 남달랐다. “한글은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며 한글 애용을 주장했으며 한글의 문장부호를 정리하기도 했다. 의사소통의 매개체로서 한글이 영어 알파벳보다 우수하다며 한국의 금속활자, 거북선 등에 대한 한국문화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그가 쓴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도 눈여겨 볼 작품이다.

1896년 우리의 전통 가락 아리랑을 악보로 만들었다. 고종의 밀사로 미국 대통령에게 도움을 청하는 역할도 했다. 우리의 주권을 지키는 일을 위해서였지만 친일인사들로 인해 좌절됐으니 한국 사람으로서는 부끄럽다.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 정보를 우리 정부에 주어 이준 등이 밀사로 파견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 직접 헤이그에 가서 유럽언론에 한국의 독립 정당성을 호소하는 노력도 했다. 독립운동을 돕다가 일제에 의해 추방되다시피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도 루즈벨트의 대한정책을 비판하며 우리나라를 돕는 순회강연과 신문기고를 지속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예배당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그의 꿈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윈스턴 처칠을 비롯하여 군주와 왕족, 셰익스피어, 디킨스, 헨텔, 리빙스턴 등이 묻힌 웨스트민스터보다 한국 땅에 묻히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긴 헐버트의 꿈.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내한했다. 그러나 노쇠한 육신은 여독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1949년 8월 5일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꿈대로 한 살 때 죽은 그의 아들이 묻혀있는 양화진, 한국 땅에 안장되었다. 그렇게 꿈은 이루어졌다. 한국 사람인 나는 어떤 꿈을 품고 있는지 헐버트 선교사를 떠올리니 참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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