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단 역사 그리고 정체성 ① 초기 한국장로교 총회 형성과 개혁주의 전통


강력한 대부흥 운동 바탕, 하나의 장로교 독노회 조직 5년 만인 1912년 총회 설립
신학적 틀 다지며 암울한 일제 강점기 시절 사회와 민족 선도할 신앙적 토대 구축


 
▲ 박용규 교수총신신대원·교회사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장로교회가 꽃피우고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한국장로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세도 그렇지만 한국장로교회는 너무도 걸출한 지도자들을 상당수 배출했다. 만주 우장에서 활동하며 한국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이룩한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 선교사, 언더우드, 마포삼열, 서경조 서상륜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를 비롯한 초기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 능력의 전도자 김익두, 순교자 주기철,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모두 장로교인들이었다.
 
1.한국장로교회 총회 형성 역사적 배경
 
한국장로교회는 몇 가지 중요한 전통 위에 세워졌다. 첫째, 처음부터 풍요로운 서구장로교 유산을 물려받았다. 존 매킨타이어와 존 로스 선교사들을 통해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전통을, 미국 북장로교선교회와 남장로교선교회를 통해 미국장로교회 전통을, 캐나다장로교선교회를 통해 캐나다장로교 전통을, 그리고 호주장로교선교회를 통해 호주장로교 전통을 전수받았다. 언더우드를 통해 화란개혁주 전통의 소중함도 배웠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통해 역사적인 장로교 전통을, 미국 남북장로교회를 통해 청교도 언약도들의 전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화란개혁교회를 통해 문화의 중요성을 배웠다. 이처럼 한국장로교는 북미와 유럽의 풍요로운 역사적 장로교와 개혁주의 유산을 소중하게 물려받았다.

둘째, 이런 다양한 장로교 선교회가 한국선교를 착수했으면서도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독자적인 장로교회를 각기 설립하지 않고 연합하여 1907년 하나의 장로교 독노회를 설립했다.

셋째, 1890년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채택하여 한국교회를 성경적 토대위에 구축하여 자립 자치 자전의 교회로 발전시켰다. 선교 경험이 풍부한 네비우스 선교사의 선교 경험에 기초하여 다듬어진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한국선교의 놀라운 기적을 가능케 만든 중요한 선교원리였고, 또한 한국교회를 말씀의 토대위에 구축하도록 만들어주었다. 말씀 중심의 주일학교교육, 사경회는 모두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채택한 결과였다.

넷째, 교회 설립과 평양장로회신학교 설립을 통해 풍요로운 서구 장로교와 개혁주의 신앙유산을 물려받았다. 처음 장로회신학교를 주도한 선교사들은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이길함(Graham Lee), 원두우(Horace G. Underwood), 소안론(W. L. Swallen), 배위량(W. B. Baird), 편하설 (C. F. Bernheisel), 곽안련 (C. A. Clark), 한위렴 (W. B. Hunt), 이눌서(W. D. Reynolds), 기일 (James S. Gale), 그리고 왕길지(George O. Engel) 등이었다. 특별히 이 중에서도 마포삼열, 소안론, 곽안련, 이길함, 그리고 이눌서 등은 평양신학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들로 이눌서를 제외한 네 사람 모두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로 미국 맥코믹신학교 출신이었다. 이들 모두 성경관은 물론 처녀 탄생, 대속의 죽음, 육체적 부활, 기적의 역사성, 역사적 재림 등을 포함한 전통적인 교리를 계승하는 철저한 구학파 전통에 서 있었다.

이 같은 전통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평양신학교는 1907년 6월 20일, 길선주, 양전백,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방기창, 이기풍 등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1908년에는 졸업생이 없었지만 1909년에 김필수, 이원민, 최충진, 윤식명, 장관선, 정기정, 최관흘, 김창성 등 8명이 졸업했고, 1910년 7월 15일에 거행된 졸업식에서는 역대 가장 많은 2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넷째, 놀라운 부흥과 성령의 역동성을 경험했다. 미국의 남북장로교 선교회는 구학파의 신학에 충실하면서도 한국에 입국하기 전 무디 부흥운동과 19세기 영미 부흥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선교사들이었다. 성경의 권위를 존중했고 복음전도에 열심이었으며 성령의 역동성을 상당히 중시하였다. 자연히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은 기도, 말씀, 예배,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균형을 이룰 수 있었다. 자신들이 서 있는 영적 신학적 유산들을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4개의 장로교 선교회가 하나의 민족교회를 설립할 수 있었다.
 
2.민족적 수난을 부흥과 선교로 극복
 
1912년 9월 역사적인 총회가 조직되었다. 돌이켜 볼 때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고 불과 5년 만에 총회가 조직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먼저 본국의 선교부가 연합으로 독노회를 조직하는 것을 반대했다.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난 후 남군이 패했고 이로 인해 미국의 남북은 너무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남장로교회와 북장로교회가 한국에서 서로 연합하며 하나의 장로교회를 설립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본국 선교부를 설득했고 본국선교부가 하나의 독노회 설립을 인준했다. 이 보다 더 힘든 것은 시대적 환경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이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했다. 정치적으로 볼 때 도저히 민족의 소망을 찾을 수 없는 어두운 상황이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독노회가 조직된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 것이 대부흥이었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부터 일기 시작한 강력한 성령의 역사, 부흥의 역사가 하나의 놀라운 대부흥운동으로 폭발한 것이 바로 1907년 평양대부흥이었다.

대 부흥이 일어난 후에 독노회 결성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독노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한 후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첫 목사안수를 받는 7명의 평양장로회신학교 졸업생들이 능력의 종으로 교회를 이끌 수 있도록 놀라운 부흥을 통해 영적으로 무장시켜 주신 것이다. 독노회를 조직하는 한국교회도 부흥을 통해 능력의 교회로 거듭날 수 있었다.

첫 안수 받은 일곱 명 가운데 한명인 이기풍 선교사를 제주도에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 선교사로 갔고, 뒤 이어 1909년 졸업생 윤식명과 1912년 졸업생 최태진이 제주도 선교사에 합류했다. 1912년 졸업생 박태로, 1913년 졸업생 사평순, 김영훈이 중국 산동 지방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1914년 졸업생 한경위가 만주 한인들을 위해 파송되었고, 1909년 졸업생 최관흘이 시베리아의 한인들을 위해, 그리고 1910년 졸업생 주공삼이 도쿄에서 한인 목회를 담당하고 있었다.

3.한국교회 성장을 견인한 한국장로교
 
1906년 12,500명이었던 한국장로교의 세례교인 수가 1910년에는 32,500명으로 증가하고, 교인 수도 44,000명에서 무려 11만 명으로 증가하면서 이왕에 결성되었던 노회로는 외형적인 성장 규모를 소화해 낼 수 없었다.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된 후 전국의 장로교회는 독노회 산하에 경기충청대리회(1893), 평남대리회(1893), 평북대리회(1907), 황해대리회(1907), 전라대리회(1901), 경상대리회(1901), 함경대리회(1902) 등 7대리회(sub-presbytery)를 조직하여 관할하였다. 이들 대리회 중 가장 규모가 큰 대리회는 경상대리회로서 186개 교회가 소속되었고, 그 다음이 평북대리회로 160개 교회, 전라대리회는 127개 교회, 평남대리회는 89개 교회, 함경대리회는 78개 교회, 그리고 경충대리회는 50개 교회였다.

이와 같이 각 대리회에 속한 교회의 수는 기성의 노회 규모와 버금가는 것이었다. 이들 7개의 대리회에 소속된 교회만도 무려 737개 교회가 되었으니 당시 노회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렇듯 각 대리회가 놀랍게 성장하면서 한국장로교회는 독노회 조직 5년 만에 불가피하게 총회를 설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11년 9월 17일, 대구 남문교회에서 회집된 제 5회 독노회에서는 1912년 3월 이전까지 7개 대리회를 노회로 승격하여 7개 노회가 총회를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1911년 독노회에서는 장감의 선교지 분할 문제의 주도권과 책임을 선교회에서 독노회(총회)로 이첩하는 한편, 주일학교의 체계적인 운영을 위해 위원회를 구성했다. 제 5회 독노회의 결정에 따라 전라대리회가 1911년 10월 15일에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목사 12명, 장로 21명이 모여 노회를 조직했고, 경충대리회가 12월 4일에 목사 12명, 장로 21명이 새문안교회에서 모여 노회를 조직했으며, 이어 12월 8일에 황해대리회가 봉산모동교회에서 목사 10명, 장로 34명이 모인 가운데 노회를 결성했다. 1912년 1월 28일에는 경상노회가 평양신학교에서 목사 28명, 장로 96명이 모인 가운데 결성되었고, 남평안노회가 1912년 1월 28일 조직되었고, 북평안노회가 1912년 2월 15일 신천북교회에서 목사 26명, 장로 15명이 모여 결성되었으며, 그리고 함경노회가 1912년 2월 20일 원산 상리교회에서 목사 14명, 장로 16명이 모인 가운데 조직되었다.
 
4. 총회 조직과 발전
 
드디어 1912년 9월 1일, 7개 노회에서 파송한 목사 총대 96명(목사 52명, 선교사 44명), 장로 125명, 도합 221명의 총대들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 경창리(景昌里)에 있는 여자성경학원에서 역사적인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결성되었다. 독노회장 이눌서의 사회로 진행된 총회에서 전국에서 모인 221명의 총대들은 총회장 언더우드, 부총회장 길선주, 서기 한석진, 부서기 김필수(金弼秀), 회계 방위량, 부회계 김석창(金錫昌) 목사를 각각 선출했다. 미국 장로교회의 경우 1706년 노회가 결성되고 82년 만인 1788년에 총회가 결성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한국장로교회가 노회 결성 5년 만에 총회를 조직한 것은 대단히 빠른 것이었다. 이와 같은 한국교회의 총회 결성은 양대 부흥운동으로 끝없이 성장하는 외형적인 교세를 노회 조직을 통해 총회 산하에 조직적으로 관할할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깊다. 또한 총회가 조직되던 1912년은 신구약 성경 번역이 완료되어 우리의 성경을 가진 지 2년째 되던 해였다.
 
 
 
맺는 말
 
한국장로교 총회는 역사적 장로교와 개혁주의 전통 위에 설립되었다. 영미의 청교도 개혁주의 유산을 가장 풍요롭게 물려받았다. 1912년 총회의 결성은 한국교회가 외형적인 틀만 아닌 신학적 틀을 다지고, 일제의 식민지 강탈 속에서 교회가 사회와 민족을 선도할 수 있는 신앙적 토대를 놓았다. 1910년 한일병탄으로 민족주권의 상실이라는 가장 슬픈 사건과 1911년 105인 사건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 결과 1914년 교세가 185,000명에 달해 인도 중국 일본을 앞설 수 있었고, 1919년 삼일운동과 1935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민족의 위기 속에서도 한국교회는 사회와 민족을 선도할 수 있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