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로교 : 역사와 신학 - ① 장로교 근간 - 칼빈의 신학

철저히 기독론에 정초한 칼빈 교회론은 개혁주의 언약신학으로 체계화
장로교회 정치 핵심요소인 ‘하나님 주권·성도의 사역 참여’ 토대 구축


 
▲ 문병호 교수
총신신대원·조직신학
1. 한국교회와 장로교: 오직 성경으로!
 
장로교는 성경적 교회 정치 구조이다. 그것은 초대교회 이후 전개된 정통 신학에 견실히 서 있다. 제네바의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장로교의 신학적 토대를 놓았으며, 스코틀랜드의 녹스(John Knox, 1514-1572)는 칼빈의 사상을 적용하여 장로교를 수립하였다.

한국 장로교는 선교 130년, 총회 수립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교회로서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의 신학과 신앙을 추구해왔다. 1962년부터 10년간 총신대학교에서 가르쳤던 선교사 간하배(Harvie M. Conn) 교수는 “한국 교회사 초기는 보수주의적 기독교,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역사였다”라고 그의 책 첫머리에 규정하면서, 그 근거로 당시 선교사들이 스코틀랜드 언약성도들의 후손들로서 보수적이며 복음적인 기독교인들이며 네비우스 선교정책(Nevius Mission Plan)의 영향을 받아 철저히 성경 중심적이었다는 사실을 거론했다.

죽산 박형룡 박사는 장로교회의 신학을 “구주대륙의 칼빈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 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 라고 정의하였다. 죽산은 한국 장로교 신학을 ‘청교도 개혁주의’라고 부르며 그 특징으로 ‘성경의 신성한 권위를 믿는 믿음’ ‘하나님 주권에의 확신’ ‘안식일의 성수와 경건생활에 치중’ ‘성실한 실천’ ‘천년기전 재림론’을 들었다. 그리하여 칼빈을 차치하고 한국 장로교를 논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2. 칼빈의 언약신학: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칼빈이 장로교의 신학적 토대를 구축했다는 점을 논의하기 위하여 그의 교회론이 갖는 교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먼저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칼빈의 교회론은 철저히 기독론에 정초해 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신 것은 그가 보혜사 성령으로 우리 속에 내주하여 우리의 안과 밖에서 중보하시기 때문이다. 성도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은 그가 다 이루신 의를 거저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셔서,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의롭다고 여기고 받아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상의 성도는 여전히 더욱 거룩해지는 과정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지하여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전심으로 순종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담대함으로 섬기는 자리에 서게 된다. 이러한 칼빈의 사상이 이후 개혁주의 언약신학으로 체계화되어 갔다.

칼빈의 신학이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신인양성(神人兩性)의 중보 사상과 더불어 선택(選擇)과 유기(遺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교리 즉 예정론이 부각되었다. 그리스도는 구속의 의를 다 이루시고 그 의를 하나님의 자녀들의 것으로 삼아주심으로 곧 전가(轉嫁)해 주심으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의 연합체 곧 한 몸을 이룬다. 칼빈은 “온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이라는 두 축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고리로 연결될 때 교회는 참되다고 보았다. 성도의 교제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저 주신 은혜와 은사를 서로 나누는 것이다. 성도는 말씀을 바로 듣고 성례에 온전히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자라간다. 이를 위하여 “온전한 교리”가 교회에 보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감독’이 되신다. 친히 목자로서 양이 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기 때문에 사죄권은 오직 주님께만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도구로 교회를 보존, 통치하신다. 사람을 세우는 것은 자신의 ‘사신(使臣)’을 통하여서 뜻을 전하고 그것을 듣게 함으로 “겸손에 이르는 훈련”을 받고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 사랑하도록 하는데 있다. 교회의 사역은 마치 ‘힘줄’과 같아서 그 직제(職制)와 직분(職分)은 교회정치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칼빈은 성도의 교회 참여를 단지 부수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고 함께 자라가는 필수적인 의무와 같이 바라본다.

칼빈은 교회의 본질을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에서 찾는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므로 그의 의를 누리고, 그의 말씀을 듣게 된다. 칼빈은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누차 강조한다. 성경의 권위는 오직 그 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성도의 교회의 삶이 역동적인 것은 구속하신 주님께서 여전히 ‘내적 교사’로서 아버지께 받은 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칼빈의 교회론은 이렇듯 기독론적 기원을 가지는데, 이는 성경이 하나님의 무오(無誤)한 말씀으로 신앙과 삶의 규율이 된다는 원리로 개진된다. 즉,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3. 칼빈의 교회론에 나타난 장로교적 특성
1) 교회의 직분과 권세

장로교 교회 정치의 두 가지 핵심 요소는 첫째 하나님의 주권, 둘째 성도의 교역(敎役)과 교정(敎政) 참여에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과 26장에서는 교회의 무형적이며 유형적인 본질과 성도의 교제를 연이어 다루고 있는데 이는 교회의 수직적 측면과 수평적 측면을 역동적으로 바라보는 장로교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칼빈의 교회론으로부터 비롯된다.

칼빈은 교회의 본질을 논하면서 성도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수직적인 연합과 성도 상호간에 하나가 되는 수평적인 연합을 함께 강조하였다. 성도의 참여는 단지 수동적이지만은 않다. 성도는 직분에 따라서 주어진 은사와 능력으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는 기회를 얻는다. 하나님은 직분을 세우실 때 은사를 미리 예비하신다. 성도들은 직분에 봉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고백하는 자마다 교회의 사역에 참여한다.

교회의 통상직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구성된다. 목사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교리로 사람들을 가르쳐서 진정한 경건에 이르게 하고, 거룩한 성례들을 거행하며, 올바른 권징을 지키고 시행하는 것”이다. 설교는 진리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전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주관적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실어 나르는 나팔수와 같아야 한다. 교회가 진리의 터 위에 서 있듯이, 설교는 그 터의 고리가 되어서 성도들을 하나님께 묶고 나아가서 상호간에 하나가 되게 한다.

교사는 가르치는 교회를 구현하기 위하여 필히 요구된다. 교사는 성경을 바로 해석할 뿐만 아니라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를 변호하는 직분을 수행한다. 칼빈은 목사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고전 4:1)로서 특별히 부각시키는데 이는 그가 가르치고 권고하는 일을 함께 수행하기 때문이다.

장로와 집사는 이러한 일을 돕는 직분으로서 나타난다. 장로의 직분은 ‘다스리는 자’(롬 12:8)로서 ‘다스리는 것’(고전 12:28)이다. 장로는 목사의 설교를 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충분히 새겨서 성도들을 권면하고 그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도덕적인 견책’과 ‘권징’을 시행하는 직분을 감당한다. 집사는 재정과 구제하는 일 그리고 긍휼을 베푸는 일을 감당한다.

이러한 네 가지 직분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선포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과 다스리는 것이 서로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고 긴밀성을 갖는다.

칼빈에 따르면 교회의 권세는 주님으로부터만 주어지고, 주님 안에서만 작용한다. 이는 ‘교리권(敎理權)’ ‘입법권(立法權)’ ‘사법권(司法權)’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삼권은 특정한 사람에게 집중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이러한 모든 권세의 주(主)가 되신다.

교리권은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권세이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은 성령의 감화 가운데 전달되어야 한다. 듣지 않고, 배우지 않은 것을 가르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무엇보다 순수하고 바른 진리에 서 있어야 한다. 성경의 권위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있다. 성경은 스스로 증거, 즉 자증(自證)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리권은 오직 성령의 감동에 순종할 때에만 참되게 작용한다.

입법권의 기원은 친히 법을 조성하셔서 수여하시는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은 법을 통하여 자신이 누구시며,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다.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법은 몸을 움직이는 ‘근육’과 같다. 그것은 교회를 세워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게 하는데 근본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법은 세상의 법에 종속되지 않으며 오히려 본질상 그보다 앞선다.

재판권은 권징의 책벌을 의미한다. 권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돌이키기 위하여 시행된다. 교회의 권징은 영적인 재판권이기 때문에 세상적인 방식을 사용할 수는 없다. 지상에서의 심판은 그것이 교회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종국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언제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버리지 말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의 손에 맡기는 기도의 자세가 필요하다. 권징의 본질은 세우는데 있는 것이지 무너뜨리고자 함이 아니다.
 
2) 교회와 국가의 관계

교회의 직분과 권세는 성도들의 참여를 통하여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사람의 판단과 자의에 맡겨지지 않으며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적인 통치 가운데 행해진다. 칼빈의 이러한 입장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다루는데 있어서도 뚜렷이 부각된다.

칼빈은 기독교인이 ‘영적 통치’와 ‘국가적 통치’라는 ‘이중적 통치’를 받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영적 통치’는 성령의 임재로 그리스도의 진리를 좇아서 살아가는 성도의 순종에 기초한다. ‘국가적 통치’는 일반은총의 산물로서 사회 질서를 유지시켜 인류를 보존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국가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교회를 외부에서 돕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국가에도 미친다. 세상의 법은 자연법에 기초하는데 공평과 사랑 등 하나님의 법 특히 제 5~10 계명과 맥이 닿아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인이자 한 사람의 국민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존재와 기능을 하나님의 통치라는 점에서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성도는 국가와 관련해서도 기도와 말씀 가운데 거룩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측면에서 국가의 통치에 따라야 한다. 정부에 대하여 저항하는 경우에도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칼빈은 교회에 대의적 참여와 대표적 감찰이 있듯이 국가에도 그러해야 한다고 본다. 여하한 경우에도 교회와 국가 양자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로 묶인 피치자(被治者)일 뿐이다. 이러한 칼빈의 입장은 이후 그의 제자 녹스에 의해서 충실히 구현되었다. 녹스의 입장에서 보면, 칼빈은 이미 ‘장로교 신학’을 충실히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