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로교 : 역사와 신학 - ③ 개혁주의란 무엇인가 : 신학과 신앙의 요체

하나님의 사상 체계적으로 심화시킨 ‘칼빈주의’와 동의어 … 근본원리는 ‘오직 성경’
율법의 끝이 아닌 완성으로서 그리스도 복음 증거 … 구원 주시는 하나님 능력 믿어


 
▲ 문병호 교수총신신대원·조직신학
1. 개혁주의의 기원: 용어의 문제
 
‘개혁주의(Reformed)’란 무엇인가? 이 말은 역사적으로 ‘칼빈주의’(Calvinism)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개혁주의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모토로 집약된다. 여기에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로’(solo Christo),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라는 의미가 모두 내포된다.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할 때, 그것이 가장 신학적이라고 여겼다. 그의 신학은 성경에서 시작되고, 성경에서 머문다. 칼빈은 ‘성경의 신학자’였으며, ‘성경적 신학자’였다

개혁주의는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믿는다.(딤후 3:16) 그리고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일”(딤후 3:14)이 성경의 진리이며 성경적 진리라는 것을 고백한다. 칼빈의 영향을 받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복음’만을 ‘성경적 복음’이라고 보았다. 이는 ‘성경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열린 입장을 지니고 ‘성경적 복음’을 ‘성경의 복음’에 국한하지 않는 포괄주의, 혼합주의, 다원주의와는 분명 대조된다.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비록 그들이 ‘복음주의’라고 자처하는 경우에도- ‘복음’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복음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개혁주의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른 참 신학과 참 경건을 엄밀하게 추구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보수주의’(Conservatism) 혹은 ‘근본주의’(Fundamentalism)라는 이름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개혁주의가 ‘보수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고유한 기원과 근원 곧 성경에 충실히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혁주의가 ‘근본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성경의 근본적 가르침인 교리를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조항으로서 견지해 왔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의 이러한 보수적, 근본적 성향은 단지 성향에 그치지 않고 신학적 정밀함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현저한 예를 16세기 말 이후부터 칼빈의 후예들 즉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수립된 개혁주의 정통주의(Reformed Orthodoxy)에서 발견하게 된다. 과연 ‘우리의 신학자’라고 불릴만한 칼빈의 후예들인 바빙크(Herman Bavinck), 카위퍼(Abraham Kuyper), 핫지(C. Hodge), 워필드(B. B. Warfield) 등은 개혁주의를 충실히 계승·심화·발전시켜 기독교 교리를 가장 체계적이면서도 부요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회고하면서 다지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전망하면서 앞으로 내딛는 자리이기도 하다.

2. 개혁주의와 칼빈주의
 
‘개혁주의’에 대한 학자들의 정의는 다양하다. 최광의(最廣義)로 이를 이해하는 입장은 그것이 성경적 진리와 정통 신학 그리고 삶을 망라하는 개념이라고 본다. 광의(廣義)로 이해하는 경우, 이는 종교개혁(Reformation)과 동일시된다. 이 경우 종교개혁 안에 개혁주의를 포함시키기도 하고 역으로 개혁주의 안에 종교개혁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여기에는 루터란도 포함된다.

대체로 개혁주의는 협의(俠義)로 이해된다. 이 경우 개혁주의는 루터란과 구별되는 개념으로서, 칼빈과 그를 잇는 후예들의 신학 즉 ‘칼빈주의’를 지칭한다. ‘칼빈주의’로서 개혁주의는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저명한 칼빈신학자 펄만(Paul T. Fuhrmann)의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칼빈의 진정한 유산은 실로 구조가 아니라 방법에 -사람, 그리스도, 믿음, 세계, 성경, 종교, 삶 등 모든 것들을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애쓰는 방법에- 있다.”

우리가 개혁주의를 ‘칼빈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칼빈이 이러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창조, 계시, 구원의 전 영역을 엄밀히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생명관(生命觀) 혹은 생활관(生活觀)이자, 세상관(世上觀)을 지칭한다. 칼빈주의에 관한 고전적 명저를 남긴 미터(H. Henry Meeter)는 이를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언급했다.
 
“칼빈주의의 중심 사상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상이다.”(The central thought of Calvinism, therefore, the great thought of God)
 
칼빈주의자들(Calvinists, Calvinians)은 칼빈에 의해 조명된 ‘하나님의 사상’을 계승하여 체계적으로 심화시킴으로 역사상 개혁주의 곧 칼빈주의를 수립하였다.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일체성(unity)과 연속성(continuity)은 그들이 공유한 ‘하나님 사상’ 그 자체에 객관적으로 놓여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대상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 ‘방법’에 있어서까지 ‘하나님의 주권’(God’s sovereignty)을 본질로 삼고 우리의 주관은 철저히 배제하는 칼빈주의의 객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3. 개혁주의의 근본원리
 
개혁주의의 근본원리는 곧 성경이다.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을 언약신학(Covenantal Theology)과 동일시 할 때, 그것은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원리를 되새기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브라함 카위퍼가 말하듯이, 개혁주의는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 삶 중심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이 모든 요소들이 어우러진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며, 교리이며, 신학이다.

성경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진다. 즉 수납(受納)된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이 성령의 조명으로 떨어지고(受) 그 감화로 들어온다(納). 세상의 지식은 이성으로 추론되지만, 성경의 지식은 오직 믿음으로만 수납된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정확무오하다. 성경의 권위는 그 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있다. 성경은 그 규범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그 역사에 있어서도 무오하며, 사상과 문자에 있어서도 무오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원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인간 저자들은 이차적이다. 그들이 받은 말씀과 기록이 모두 정확무오하다.

이러한 성경관에 기초해서 개혁주의의 원리를 수립한 대표적인 사례로 도르트 회의(the Synod of Dort, 1610)에서 수립된 칼빈주의 5대 교리(TULIP)를 들 수 있다: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그리고 미국 북장로교회(PCUSA)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기 전인 1910년에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신도게요서)의 가르침으로 선포한 소위 5대 교리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의 무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기적들.”
 
4. 개혁주의 언약신학
 
개혁주의는 율법주의도 율법폐지주의도 모두 거부한다. 개혁주의는 율법의 끝이 아니라 완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한다.(마 5:17; 롬 10:4) 그리스도는 율법을 다 이루시고 그 다 이루신 의를 전가(轉嫁)해 주심으로 성도가 은혜 가운데 율법을 행하며 살도록 하신다. 칼빈은 이를 율법의 가장 주요하고 고유한 용법이라고 하였다.

언약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작정을 제2위 성자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다 이루시고 그 의를 성도의 의로 삼아주시는 경륜 곧 질서를 뜻한다. 이는 구속사적 성취와 구원론적 적용을 포함한다. 구속사적 성취는 주님께서 단번에 모든 의를 다 이루셨음을 뜻하며(요 19:30), 구원론적 적용은 그가 자신의 영을 부어주심으로 그 다 이루신 의를 성도의 것으로 삼아주시는 의의 전가를 뜻한다.(행 2:33)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이렇듯 구속사적-구원론적 관점에서 성경의 진리를 수납한다.

타락한 인류는 사망의 형벌을 받고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상태로 태어나 아무도 스스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영생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셔서 모든 고난을 당하시고 율법을 모두 순종하여 우리를 위한 의를 다 이루셨다. 그 의가 우리의 영생의 값이 되었다.

율법은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으로서, 언약의 백성이 살아가는 길로서 하나님이 주셨다. 율법은 본질상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신령하다.(롬 7:12, 14) 다만 죄로 말미암아 율법이 저주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율법은 언약의 법 곧 토라이므로 명령과 함께 약속이 있다. 그리하여 율법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뜻을 계시한다. 율법의 약속을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죄사함과 의의 전가의 은혜를 선포한다. 율법은 자신의 죄를 깨달아 그리스도에게 도망치게 하는 용법과 거듭난 사람이 그 가르침을 좇아 살아가는 규범이 되는 용법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요체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벗어나서 뜻을 다하여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언약의 법으로서 율법은 오직 복음 안에서만 신학적인 기능을 감당한다.

이렇듯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칼빈의 가르침을 계승, 심화시킨 것이었다. 칼빈은 우리가 스스로 알 수 있다는 합리주의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질주의 혹은 공로주의도 거부한다. 또한 우리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도, 우리가 할 수 없다는 운명론도 거부한다. 칼빈에 따르면, 우리는 알되,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한 안다. 또한 우리는 할 수 있으되, 하나님이 능력주시는 한 할 수 있다. 여기로부터 언약신학의 지평이 열린다. 그 지평은 오직 말씀만을 불변하고 충족한 진리로 삼는 참 신앙과 자기를 부인하면서 오히려 큰 담대함을 얻는 참 행실을 아우른다. 한국 장로교는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에 의해서 수립된 개혁주의를 서구의 여러 경로를 통하여 받아들였다.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초기 선교사들은 개혁신학에 대한 식견이 깊었으며 신앙과 삶 또한 그에 걸맞게 경건했다는 점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한다. 역사적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 생명을 살릴 뿐만 아니라 생활을 거룩하게 하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작용함을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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