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로교 : 역사와 신학 - ④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신앙고백서)

‘오직 성경으로’ 개혁주의 원리에 기초, 종교개혁 후 125년 동안의 개신교 신학 집대성
1647년 스코틀랜드 총회 채택 이후 장로교 정치·행정 본질 제시 ‘공유자산’으로 인식


1. 형성과 계승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信徒揭要書,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이하 신도게요서)는 종교개혁 이후 125년 동안의 개신교 신학을 집대성했다. 그 근저에는 칼빈의 신학으로부터 비롯되는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맥이 면면이 흐른다. 여기에는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이 역동적으로 다루어지고 구원의 전적인 은혜와 성도의 경건한 삶이 함께 강조되며,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복음과 율법, 하나님의 주권과 성도의 책임이 조화롭게 논의된다. 가히 성경의 진리에 대한 최고의 고백서라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1647-1648)의 주류를 점했던 사상은 당시 팽창되고 있었던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칼빈주의’였다. 무엇보다 신약과 구약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그것을 교회정치의 영역까지 적용하고자 했던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영향이 주목할 만하였다. <신도게요서>는 1647년에 스코틀랜드 총회가 이를 채택한 것을 필두로 미국과 영국의 여러 장로교파와 일부 회중교회와 침례교회도 받아들였다. 우리나라의 장로교단은 1907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신조(12신조)”를 채택했는데 이는 <신도게요서>의 영향을 받은 인도장로교회의 신조를 본 떠 만든 것이었다. 이후 1974년 총회 헌법에 <신도게요서>가 실리게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구현된 신학은 영국과 대륙이 함께 호흡했던 16-17세기 칼빈주의의 공유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채택되고, 영국 의회에서 1648년에 승인된 ‘장로교정치양식’은 1647년 스코틀랜드 의회가 채택한 ‘교회행정을 위한 지침서’와 더불어 장로교 정치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장로교정치양식’은 교회 정치의 본질이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와 계속적 중보에 있다는 <신도게요서> 25장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구현하였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지교회의 공동의회와 제직회(직원회의)의 활동이 강화되고, 무엇보다도 교회에 대한 노회의 행정과 치리를 강조하였다. 주목할 것은 여기에서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직분을 규정하되, 서로간의 견제보다는 사역의 효율성이 고려되고, 교회교육과 권징의 긴밀성과 이웃에 대한 구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이다.
 
2. 유형 교회와 무형 교회의 역동성

이러한 <신도게요서>의 장로교적 특성을 교리적으로 고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도게요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로부터 유형 교회(가시적 교회)와 무형 교회(비가시적 교회)의 관계를 천명한다. ‘보편적 혹은 우주적 교회’는 그 본질에 있어서 비가시적이나, 지상의 가시적 교회도 그리스도의 은혜를 함께 받은 한 몸이라는 측면에서 보편적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가치는 그 본질을 떠나서는 논할 수 없다.(25.1~4)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말씀의 감화를 받아 주님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의 모임이라는 측면에서 거룩하다. 그러나 지상의 성도가 완전하지 않듯이 지상의 교회도 완전하지 않다.(25.5) 오직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시며(25.6), 성도는 그 분 안에서 성령의 감동에 따라서 말씀의 교제를 나눈다. 교회의 직분의 본질은 성도의 교제와 연합에 있다.(26.1~2) 성도의 교제는 복음의 은혜를 나누는 것이지 각자의 이상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다.(26.3)

이렇듯 유형 교회와 무형 교회를 불문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하나이므로, 말씀을 권고하고 권징을 시행하는 권한은 그 몸을 하나로 세우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권세는 맡겨진 복음에 있는 것이지 개인의 자질이나 공로에 있지 않다.(30.1~2) 권징은 단지 형벌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30.3~4) 개교회에 대한 지방 회의와 총회의 치리도 이러한 관점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주님은 파괴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우기 위해서 오셨다.(31.1~3) 이렇듯 <신도게요서>는 교회의 권한과 직분을 교회의 본질 가운데서 이해하고 있다.

교회의 이러한 권세는 고유하므로 시민국가의 권세와는 구별된다. 교회는 어떤 기관이나 회(會)의 이름으로도 국가의 정치에 간섭할 수 없다.(31.4) 국가 위정자도 교회의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23.3) 다만 위정자도 하나님이 세우셨으므로 위하여 기도해야 하며 성도는 국민의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23.1~2, 4) 여기에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신앙고백서와 치리서의 정신이 여과 없이 구현되어 있다.
 
3. 칼빈신학과 개혁주의를 잇는 장로교의 전통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론적 관점에서 <신도게요서>에 나타난 장로교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장로교 신학’은 장로교 정치를 논외로 하고서 다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러한 교회의 본질, 교직, 교권에 대한 <신도게요서>의 입장이 철저히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도게요서>는 그 서장을 성경론에 할애한다. 그것은 일반계시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된다. 일반계시를 인정하되 그것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일반계시의 불충분성과 특별계시의 보충성을 뚜렷이 천명했다.(1.1) 성경은 스스로 증거한다. 즉 자증(自證)한다. 성경은 무오하며, 신적 권위가 있다.(1.5)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권위는 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1.4) 성경은 자체로 충족하다. 오직 성령의 내적인 조명(照明)으로만 성경의 진리가 계시된다.(1.6) 성경에 대한 해석자는 성경 자체이다.(1.9) 성경에 대한 판단은 성경 자체에 돌려진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도가 읽을 수 있도록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1.8)

성경의 속성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영국과 대륙의 개혁신학자들에 의해서 견지되는 바이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시작하여 성경과 성령의 관계를 논하는 순서로 계시론을 다룬 효시(嚆矢)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였다. 녹스에 의해 주도된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성경 읽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은 자증하며, 스스로 권위가 있으며, 충족하고, 모든 논쟁에 있어서 마지막 기준이 된다는 사실은 단지 교리적인 부분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의 구조와 조직, 직제, 정치, 나아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장로교 정치가 근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다. 교회의 포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설 수 없다.(31.3)

<신도게요서>의 이러한 이해는 칼빈의 신학과 스코틀랜드 장로교 사상과 부합한다. 그 기초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구속의 의를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거룩한 삶을 주장하신다는 언약신학이 자리 잡고 있다.(8.1) 성도는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데,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풍성한 삶의 열매를 맺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다.(11.1~3) 보혜사 성령의 내주(來住)와 함께 성도는 의롭다 칭함을 받고 그 가운데 거룩하게 자라간다. 칭의와 성화가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다.(13.3)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는 성도의 삶 전반에 나타난다. 성도는 모든 고난을 다 당하시고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여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와 율법폐지주의는 모두 배척되어야 한다.(19.6~7)

<신도게요서>는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계속적으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는 것은 우리가 받은 “보혜사 성령”(요 14:16; 16:7)이 “그리스도의 영”(롬 8:9)이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누차 강조한다. 주님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맺은 행위언약의 조건을 다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파기한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도 다 치르셨다.(요 19:30) 그리하여 그 공로와 의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자녀삼아 주셨다. 동일하신 성령이시지만 우리가 받은 새 언약의 영, 곧 “양자의 영”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은(롬 8:15; 갈 4:6) 이러한 구속사적 성취와 구원론적 적용의 은혜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7.1~5) “그러므로 본질 면에서 차이가 있는 두 종류의 은혜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세대에 걸쳐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동일한 언약이 있을 뿐이다.”(7.6)

<신도게요서>는 성도의 구원을 다루면서 우리가 받은 성령이 “진리의 영”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한다.(요 14:17, 26; 15:26; 16:13) 칼빈이 말했듯이, 진리의 영의 역사로 성도는 성경이 확실한 객관적 진리일 뿐만 아니라 주관적으로 나에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그 말씀이 나의 말씀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시는 ‘의의 전가(轉嫁)’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지혜의 부요함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부요함을 삶 가운데 구현하며 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나누게 된다. 국가는 이러한 영적인 왕국을 보호하고 그 고유한 특성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그 앙양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 여기에 장로교 언약신학의 핵심이 있다. 장로교 정치는 말씀을 교회와 세상에서 구현하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신도게요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성도의 구원을 이루시고 끝까지 견인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사랑과 성도의 책임있는 삶, 그리고 진정한 국가의 존립가치를 함께 강조하고 있다.(1, 17, 20, 23, 25)
 
4. 의의와 가치
 
<신도게요서>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칼빈과 그 맥을 잇는 개혁주의의 원리에 기초해 있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완전하고 무오한 ‘신앙과 생활의 법칙’이 된다.(1.2) 성경 자체가 성경해석의 법칙이 된다. 성경의 권위는 그 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있다.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신도게요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함께 강조한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선택과 유기(遺棄)를 작정하셨다. 하나님은 성령과 말씀으로 택함 받은 성도가 믿고 확신하는 바에 거하게 하셔서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언약백성으로서 마땅한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한 인류의 일부를 자녀로 삼으시고 교회 안에서 그들을 끝까지 붙드신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끄심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유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한 몸으로 모인 언약 공동체이다.

죽산 박형룡 박사가 지적했듯이 <신도게요서>를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받는 한,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분명하다. 그것은 역사상 그 정통성이 변증된 ‘개혁주의’이다. 죽산은 “정통신학은, 신구약 성경을 천계(天啓)와 영감(靈感)으로 말미암아 온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정확무오한 법칙으로 인정하는 초자연적인 성경관을 가진다”고 피력하여 그 자리매김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개혁주의 특히 장로교 전통에 정확하게 잇대어 있다. 그러므로 성경과 함께 이를 즐겨 배우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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