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한족연합위’ 조직, 애국신앙 실천하다

조국과 겨레를 위해 온 몸을 던진 선열들을 추모하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흘러온 역사 속에서 애국신앙의 표본으로 살다간 믿음의 선배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후세로 살아가는 한국교회에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가보훈처가 선정해 발표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올해에도 다수의 기독인 애국지사들이 선정됐다. 그 중에서 올 봄을 장식한 네 명의 인물과, 이들의 이름을 우리가 두고두고 기억하게 만든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지도자들이 하와이 호놀룰루에 모여 촬영한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지도자들이 하와이 호놀룰루에 모여 촬영한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결성

각자 이념과 정치적 입장에 따라 분열을 거듭하던 항일 독립운동 세력을 다시 하나로 규합하자는 움직임이 1930년대 후반 중국에서부터 좌우합작 형태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 본토와 하와이의 한인사회에서도 새로운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했다.

1941년 4월 호놀룰루에 집결한 재미 한인단체들은 ‘해외한족대회’를 열고 독립운동 전선을 통일하고, 임시정부를 받들기 위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라는 이름의 연합기관을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고 이승만을 대표로 선정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치는 한편, 태평양전쟁을 시작한 일본에 맞서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국의 국방공작을 지원하기도 했다.

지역특성상 집행부는 미국 본토에, 의사부는 하와이에 두는 이원체제로 운영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주축을 이룬 세력은 하와이에 거주 중인 기독인들이었다. 창립 당시 의사부 영문서기를 맡았다가 훗날 위원장으로 조직을 이끈 김원용, 부인구제회 대표로 의사위원에 선출된 민함나와 심영신, 선전부장으로 외교전선에서 맹활약한 전경무 등이 그 핵심 인사들이다. 이들은 나란히 2021년 4월 국가보훈처 선정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이름을 올렸다.

①김원용(1896~1976·건국훈장 애국장)

서울 태생인 김원용은 1917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콜로라도 푸에블로에 정착하며 다른 한인들과 함께 애국운동을 시작했다. 1924년 시카고에서 한인감리교회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한 김원용은 1930년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동지회미포대표회’ 시카고 대표로 참석했다.

이후 ‘하와이애국단’을 조직해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혈성금’ 모금운동을 전개하는가 하면,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참여해 의사회 위원장으로서 대외 선전과 외교활동을 이끌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 하에서 입법의원의 관선위원으로 활동하며 정당통합과 통일정부 수립에 앞장섰다. 미주의 한인들이 전개한 독립운동 역사를 집대성한 <재미한인50년사>를 저술하기도 했다.

②민함나(1888~1952·건국훈장 애족장)

경기도 부평 출신인 민함나는 1914년 하와이로 이민해 대한부인구제회 하와이 대표,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평신도 대표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부인구제회 대표 및 의사부 위원 등을 역임했다. 특히 독립자금 수봉위원으로 활동하며, 1938년부터 1945년 사이에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 지원을 성사시키며 조국 광복에 기여했다.

③심영신(1882~1975·건국훈장 애국장)

심영신은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자랐다. 1916년 하와이로 이주해 대한인부인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활동하며 한인자녀의 국어교육 장려, 일제용품 구매 거부운동, 교회와 사회단체 후원, 재난동포 구제 등에 앞장섰다. 3·1운동이 발발할 당시에는 국내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하와이 부녀공동대회를 개최하고, 1920년대 말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으로부터 재정부족을 호소하는 편지를 받고 자금모집을 주도하기도 했다.

④전경무(1898~1947·건국훈장 애국장)

평안북도 정주의 곽산에서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장남으로 자란 전경무는 1906년 부모를 따라 하와이로 이주했다. 이후 미국 미시건대 정치학과에 입학해, 동양인 최초로 전미 대학웅변협회 회장을 맡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다. 하와이로 돌아온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 단합회에 가입하고,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에는 무장단체인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되면서 의사부 위원이 되어 임시정부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담당했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가 조직한 주미 외교위원부에서 위원장 비서로 선출되어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한국의 런던올림픽 참가를 성사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순직하고 말았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