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운동 계승, 건강한 공동체로 서다

서천 금당교회는 114년 역사 속에서 지역과 시대를 선도해온 신앙공동체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서천 금당교회는 114년 역사 속에서 지역과 시대를 선도해온 신앙공동체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금당교회와 조남영 장로

금당교회는 1907년 5월 7일 유성열 영수의 인도를 받은 장년 18명, 유년 15명의 성도들이 서천군 화양면 금당리의 초가 7칸을 매입해 회집하며 설립됐다. 올해로 114년의 역사를 이어온 공동체이다.

수많은 사건들과 인물들이 금당교회의 역사를 장식했지만,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가장 깊이 새겨진 인물은 조남명 장로이다. 부친인 조찬구가 인근 군산으로 왕래하다, 노방전도를 하던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고 회심한 것이 믿음의 가문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금당교회 초대 장로이자 서천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인 조남명 장로 부부 사진.
금당교회 초대 장로이자 서천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인 조남명 장로 부부 사진.

아버지의 권유로 신앙세계에 입문한 조남명은 군산의 하위렴 선교사를 찾아가 성경을 배우며, 복음전도와 민족계몽을 자신의 사명의 삼는다. 그리하여 43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평양신학교로 진학한다. 제9회 졸업생이 되는 그의 동기들은 목회자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지도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이었다. 훗날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이 대표적이다.

조남명도 마찬가지로 서천의 청하당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키우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신속하게 서천에서 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3월 4일 미국남장로교 군산선교부의 유재경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후, 지인 성도 제자들을 규합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한 것이다.

금당교회가 보존하고 있는 수많은 기록물들 중에는 ‘별명부’와 ‘시벌인 명부’도 눈에 띈다.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엄정한 관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금당교회가 보존하고 있는 수많은 기록물들 중에는 ‘별명부’와 ‘시벌인 명부’도 눈에 띈다. 교우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엄정한 관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제자 한 명의 배신으로 모의는 사전에 발각됐고, 조남명은 일경에 체포되고 만다. 하지만 그의 체포는 오히려 엄청난 불씨가 됐다. 조 장로의 손자인 조성기가 집필한 <독립유공자 조남명 장로 유사>에 따르면 3월 8일 경찰에 연행되어가던 조남명이 길산 장터를 지나는 길에 군중들을 만나,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한 것이 순식간에 집단봉기로 번졌다고 한다.

이어 3월 29일에는 마산면 신장리 장터에서 2000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더 큰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결국 만세운동 주동자로 지목된 조남명은 4월 1일 공주법원에서 태형을 선고받는다. 최고 형량인 90대에 무려 30대를 추가하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유갑상 목사는 교회의 위상과 사명을 다시 건강하게 세우는 것을 가장 큰 과제로 여긴다.
유갑상 목사는 교회의 위상과 사명을 다시 건강하게 세우는 것을 가장 큰 과제로 여긴다.

매질을 견디다 못해 의식을 잃고, 잠시 사망선고까지 받았다가 겨우 깨어난 조남명은 이후 여러 해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가족들의 눈물겨운 간호와 성도들의 기도 속에 힘겨운 투병생활을 겨우 끝낸 조남명은 금당교회로 돌아와 1923년 4월 15일 초대 장로로 임직한다.

그 이듬해 금당교회는 예배당을 신축하고, 다시 한 해 뒤에는 최상섭 목사를 청빙하면서 조직교회로서 면모를 제대로 갖추게 된다. 이후 새 예배당 건축(1960년) 고마교회의 분립(1977년) 어린이선교원 개원(1981년) 교육관 건축(2000년) 등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으나, 조남명 장로의 이름과 행적만큼은 금당교회에 언제나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해방의 감격을 기어이 지켜보고 1947년 세상을 떠난 조남명 장로를 대한민국정부는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고, 대통령 표창을 했다. 조 장로의 후손들 또한 각각 독립운동가, 목사, 군인, 교사 등으로 활동하며 고인의 신앙과 애국심을 계승하며 살아왔다.

1965년 부흥회를 마친 직후의 금당교회 모습.
1965년 부흥회를 마친 직후의 금당교회 모습.

특히 조봉희 목사(서울 지구촌교회)의 경우, 지금도 금당교회에 재건축 등 큰 일이 생길 때마다 가장 먼저 후원자로 나서며 조부께서 일으킨 신앙 공동체에 활력을 더하고 있다. 전국에서 활동하는 30여 명의 금당교회 출신 목회자들 또한 같은 정신을 품고 사역 중이다.

이스라엘 선교사로 봉직하다 2006년 금당교회 제13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유갑상 목사는 이후교회 설립 100주년과 110주년 기념행사를 맡아 치르면서, 교회의 위상을 회복시키는 데 주력해왔다. 과거 선배들처럼 지역을 선도하며, 하나님나라의 가치들을 구현하는 사역들도 펼쳤다.

특히 성탄절과 같은 절기가 되면 주변의 가난한 가정들을 선정해 선물과 각종 지원을 아낌없이 제공하는가 하면, 교회설립주일에는 교인들이 바친 감사헌금으로 장학사업도 전개해 세상의 칭찬을 받고 있다. 교회당 옆에서 공동 경작하는 고구마 밭 수확도 이웃들과 함께 나눈다.

 

애국신앙 요람, 긍지의 역사 이어가다

화촌교회와 송기명 장로

애국신앙의 요람으로 초창기 역사를 장식한 서천 화촌교회.
애국신앙의 요람으로 초창기 역사를 장식한 서천 화촌교회.

금당교회와 같은 서천군 화양면에 소재한 화촌교회는 비슷한 연배에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기억을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다. 화양면과 이웃한 한산면 연봉리교회에서 1911년 완포리교회가 분립하고, 이 교회가 1934년 화촌리로 이전하면서 현재의 화촌교회 역사가 이어져온 것이다.

완포리 시절에 교회를 이끌어간 지도자는 김인전이었다. 훗날 목사가 되어 전주서문교회를 담임하며 전주지역 만세운동을 이끌었고,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현재의 국회의장에 해당하는 의정원장을 지내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생명을 바친 바로 그 인물이다.

화촌교회가 자랑하는 대표적 애국지사인 김인전 목사.
화촌교회가 자랑하는 대표적 애국지사인 김인전 목사.

김인전은 초대 장로로서 완포리교회를 섬기는 한편, 동네에 한영학교를 설립해 겨레의 미래를 지탱해낼 수많은 인재들을 키워내기도 했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송기면이었다. 화촌리에서 나고 자란 송기면은 교회와 학교를 통해 구국신앙을 키우다 3·1운동의 격랑기를 맞이했다.

그는 서천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자택에서 태극기 200개를 제작하는 한편, 유성열 이근호 임학규 등과 구체적인 모의를 시작했다. 날짜는 3월 29일, 장소는 마산면 신장리로 정했다. 신장리는 서천에서 가장 큰 장이 서는 곳이었다.

송기면 장로
송기면 장로

당일 오전 11시에 드디어 태극기를 손에 쥔 군중들의 봉기가 벌어졌다. 22세의 송기면이 선봉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 일대를 행진했고, 인파는 점점 불어 2000여 명에 이르렀다. 장터를 감시하던 일제 경찰들에게도 단연 송기면은 눈에 띄는 존재였고, 결국 그는 유성열과 함께 가장 먼저 연행됐다.

송기면이 잡혀가자 그의 형 송여직이 대신 행렬을 선도했고, 오후 들어 봉기는 더욱 거세졌다. 송여직과 다른 지도자들마자 붙들려가는 상황이 되면서, 군중들의 분기는 극에 달했다. 결국 일경들의 출장소를 습격해 파손하는 지경에 이르러 경찰들이 도망치고, 송기면 등 체포되었던 인사들은 탈출했다. 이 사건으로 송기면은 재판을 받고 1년 6월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932년에 작성되기 시작한 화촌교회 세례문답자 명부와 학습문답자 명부.
1932년에 작성되기 시작한 화촌교회 세례문답자 명부와 학습문답자 명부.

만세운동이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난 후 완포리에서 화촌리로 교회가 옮겨갔을 때, 송기면은 그의 학문적 스승인 동시에 영적인 스승이었던 김인전처럼 장로로 장립되어 화촌교회를 이끌어갔다. 해방 후인 1953년에는 만세운동을 함께 이끌었던 임학규가 뒤를 이어 장로 장립을 받으며 교회의 발전기가 계속됐다.

임민혁 목사는 성도들을 과거처럼 튼실한 신앙 위에 세우기 위해 매진하는 중이다.
임민혁 목사는 성도들을 과거처럼 튼실한 신앙 위에 세우기 위해 매진하는 중이다.

1961년 시작된 교회당 신축공사는 화촌교회의 전성기를 알리는 상징과도 같은 일이었다. 당시에 남녀노소 성도들이 일광산에서 돌을 운반하여 건축한 예배당의 모습은 1986년 증축이 이루어진 후 현재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증축한 예배당의 헌당식이 열릴 무렵에는 화촌교회의 장년 성도가 128명, 주일학교 학생이 108명에 이를 정도로 탄탄한 교세를 자랑했다.

그 사이 조남열 황재규 양승만 조성영 홍은표 장활광 김세중 안영규 지천석 이재은 안기훈 등 여러 교역자들이 부임해 성도들을 돌보았다. 제13대인 임민혁 목사는 지난해 부임해, 기도생활에 초점을 둔 목회를 펼치는 중이다. “귀농 귀촌하는 이들을 교회에서 앞장서 받아들이고, 성도들이 예배의 자리를 흔들림 없이 지키도록 지도하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1980년대에 예배당 증축공사를 위해 함께 일하는 화촌교회 교우들 모습.
1980년대에 예배당 증축공사를 위해 함께 일하는 화촌교회 교우들 모습.

교세나 위상이 예전과 같지 않지만 송기면 장로가 1990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된 일이나, 금당교회와 나란히 총회로부터 ‘3·1운동 참여교회’로 지정받은 일 등은 화촌교회의 자긍심을 크게 북돋웠다. 앞으로도 소중한 역사를 잘 보존하고 선배들의 정신을 열심히 계승하겠다는 것이 임 목사와 성도들의 다짐이다.
정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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