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호의 골목길 역사산책] 배꽃 핀 언덕, 이화학당
[최석호의 골목길 역사산책] 배꽃 핀 언덕, 이화학당
  • 박용미 기자
  • 승인 2019.11.19 13: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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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대 관광경영학과 교수)

아펜젤러 목사와 스크랜튼 부인은 교육선교사로, 의사 스크랜튼은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들어 온 것은 1885년이다. 스크랜튼 의사는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서 일하다가 시병원을 설립한다. 아펜젤러는 1886년 6월 8일 두 학생으로 배재학당을, 스크랜튼 부인은 6월말 한 학생을 데리고 이화학당을 각각 시작한다.

스크랜튼 선교사가 세운 이화학당의 옛 모습.
스크랜튼 선교사가 세운 이화학당의 옛 모습.

이화정(梨花亭) 터와 주변 초가집 열아홉 채를 사들여서 이화학당을 짓는다. 배밭 자리 배꽃 핀 골에 세운 학교다. 한양에서 전망이 제일 좋았단다. 그런데 학생이 없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 아이를 살찌워서 피 빨아 먹는다’는 소문 때문이다. 1886년 5월 31일 김 씨 부인이 가마를 타고 하인을 거느린 채 찾아왔다. 고관 소실인 김 씨 부인은 영어를 배워 명성왕후의 통역이 되고자 했으나 그만 병에 들어 석 달 만에 떠난다. 6월말 10살쯤 된 꽃님이라는 가난한 여염집 여자아이가 입학한다.

이렇게 이화학당은 여자 아이 단 한 명으로 시작했다. 지금도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표기는 Ewha Womans University다. 원래 여자대학교 영문표기는 Women’s University다. 우리말로 하면 ‘여자들의 대학교’다. 세상 어느 대학교가 단 한 사람을 위해서 개교하겠는가! 만약 있다면 그것은 개인교습이지 대학교육은 아니다. 그래서 여자를 복수로 해서 Women’s University라 표기하는 것이다. 이화여자대학교는 학생 한 명으로 시작해서 아주 느린 속도로 학생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교명을 Ewha Womans University라 했다. 복수 women대신 단수 woman에 복수를 나타내는 s를 붙여서 교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처음 문을 열었던 그 때를 기억한다. 여성이 아무런 이유 없이 차별 받았던 그 때를 기억한다.

1887년 2월 학생이 7명으로 늘어나자 고종이 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 교명을 하사하고, 외무독판 김윤식을 통해 편액(扁額)을 내린다. 아펜젤러가 만든 배재학당, 스크랜튼 부인이 세운 이화학당, 스크랜튼 의사가 설립한 시병원 등 모두 고종이 하사한 이름이다. 정동제일교회를 사이에 두고 좌우 언덕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연달아 서 있다. 지금도 두 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들은 ‘우리 배재학당 이화학당 연애합시다’라는 자기네들의 노래를 부르곤 한다. ‘우리 배재학당 배재학당 노래합시다’로 시작하는 배재학당 교가에 가사를 바꿔서 부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화여자대학교는 프라이(Lulu Frey, 1868~1921) 선생이 1910년에 만든 이화학당 대학과에서 시작한다. 프라이 선생은 1893년 10월 12일 교육선교사로 제물포에 도착한다. 1904년 정부 인가를 받고 최초로 4년제 중학과를 설치한다. 1910년 드디어 대학과를 설립하고 우리나라 여성교육에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다. 1914년 최초로 졸업생 3명을 배출한다. 김애식은 <교육요소로서의 놀이>, 신마실라는 <한국미술탐부>, 이화숙은 <미국 시인 롱펠로우> 등의 졸업논문을 우리말과 영어로 발표한다. 1915년 유치원 사범과를 설치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범대학으로 발전한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일제는 이화학당 박인덕 교사를 수업도중 체포하고, 제암리교회 성도 23명을 불에 태워 죽인다. 프라이 선생은 도주 우려가 없으므로 수갑을 채우지 말라고 요구하고 경찰서까지 동행한다. 이부자리와 사식 그리고 영치금을 넣어주고 조용히 박인덕 교사를 면회한다. 프라이 선생은 한 달 넘게 제암리에 머물면서 주민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제암리사건 뒷수습을 마친다. 안식년으로 미국에 갔다가 1920년 가슴에 멍울을 발견한다. 1921년 오하이오 벨폰테인에 묻힌다. ‘이화여자대학교 설립자 및 초대총장 룰루 프라이’라고 묘비에 새긴다.

프라이 선생이 말하는 ‘이화인’은 ‘영어에 능통하다. 풍금을 잘 탄다. 국한문성경을 잘 읽는다’. 나라 잃은 겨레를 신앙으로 깨우치는 국제적인 교회지도자로 키우고자 한 것이다. 척박한 땅에서 아름다운 신앙인을 만들어내려 애썼던 초기 선교사들의 열정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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