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문> 문화칼럼이 새로운 필자들과 함께 인사드립니다. 첫 필자 최석호 교수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사산책자입니다. 팍팍해진 일상에 따뜻함과 즐거움을 덧입혀주는 여가와 신앙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편집자 주>

1913년 헌당 당시 승동교회의 모습. 승동(勝洞)이라는 이름은 길선주 목사가 지었다.
1913년 헌당 당시 승동교회의 모습. 승동(勝洞)이라는 이름은 길선주 목사가 지었다.

인사동 승동교회 마당에는 표지석 두 개가 있다. 하나는 ‘3·1독립운동 기념 터’ 표지석이고, 다른 하나는 ‘이율곡 선생 살던 집 터’ 표지석이다. 1584년 1월 16일 율곡 이이 선생이 대사동 우사(大寺洞 寓舍)에서 49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감한다. 승동교회 마당이 바로 그 대사동 우사다.

승동교회는 승동에 있는 교회라는 뜻이다. 그런데 승동이라는 행정동은 없다. 왜 인사동에 있는 교회 이름이 승동(承洞)인가? 1914년 일제가 부제(府制)를 실시하면서 승동은 없어졌다. 관인방 대사동(寬仁坊 大寺洞)과 승동을 합쳐서 인사동이라 불렀다. 교회 이름을 승동이라 부른 것은 부제 실시 전까지 있었던 승동에 세운 교회라는 뜻이 된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한자로는 승동(承洞)이 아니라 승동(勝洞)이라 쓰기 때문이다.

1892년 시카고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한 모삼율(Samuel Forman Moore, 1860~1906) 선교사는 곤당골(조선호텔과 롯데호텔 사이에 있었던 마을로 美洞(미동)이라 부르기도 했다)에 집을 짓고 곤당골교회와 기독소학교를 시작한다. 기독소학교 학생 박서양의 아버지 백정 박성춘이 발진티푸스에 걸린다. 고종 임금의 시의 에비슨(Oliver R. Avison)과 함께 박성춘의 집을 찾는다. 회복한 박성춘은 백정들을 이끌고 곤당골교회에 입교한다. 곤당골교회는 백정교회라는 별명을 얻는다.

1895년 4월 20일 박성춘은 세례를 받는다. 그날 절반 이상의 교인들이 광교 근처에 홍문섯골교회를 세워서 나갔다. 1898년 곤당골교회에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된다. 1899년 곤당골교회와 홍문섯골교회는 다시 합친다. 그러나 선교사 공의회는 홍문섯골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1902년 홍문섯골교회를 폐쇄하고 신자들을 구리개병원(구리개에 있는 왕립병원 제중원)에서 예배드리도록 한다. 1904년 세브란스병원을 준공하면서 구리개병원에서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은 승동으로 간다. 교회 이름도 승동교회라 고쳐 부른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를 모시고 부흥회를 연다. 길선주 목사는 승동(承洞)을 승동(勝洞)으로 고쳐 부를 것을 제안한다. 승동교회 바로 앞에 큰 절(大寺)이 있었기에 조선시대에는 대사동이라 불렀다. 이기는 교회가 되자는 뜻으로 이길 승으로 바꾼다.

1910년 재동에서 안동교회가 새롭게 출발한다. 백정과 합석하기를 꺼렸던 승동교회 신자들과 연동교회 양반 신자들이 합쳐서 세운 교회다. 양반교회라 불렀다. 1911년 12월 백정 박성춘은 승동교회 장로가 되면서 천민과 양반의 해묵은 갈등을 마감한다.

1919년 승동교회는 독립의 열기로 가득 찬다. 2년 전 승동교회에 부임한 제5대 담임 차상진 목사는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격문 <12인 등의 장서>를 작성하여 조선총독부에 제출한다. 승동교회 청년면려회장 김원벽은 연희전문 기독학생회장이었다. 김원벽을 비롯한 서울 시내 6개 대학생 대표들이 1919년 2월 20일 승동교회에서 제1회 학생간부회의를 개최한다. 김원벽은 3·1 독립만세운동에 이어서 3월 5일 남대문역 앞에서 연희전문 대표로 대학생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다. 승동교회 마당에서는 지금도 10만 양병을 외치는 이율곡 선생의 음성과 성도들의 독립만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최석호 교수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 대학원(문화사회학)과 고려대 대학원(레저관광사회학)에서 공부한 뒤 영국 노팅햄트렌트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유산관광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소장이며, 서울신대에서 관광경영학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내용을 입력하세요.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