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호의 골목길 역사산책] 두 개의 문②
[최석호의 골목길 역사산책] 두 개의 문②
  • 박용미 기자
  • 승인 2019.10.23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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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대 관광경영학과 교수)

1882년 조미통상조약을 체결한다. 1883년 5월 미국공사 루시어스 푸트가 정동에 미국공사관을 개설한다. 고종은 답례로 민영익을 전권대로 한 보빙사 일행을 미국에 파견한다. 1883년 7월 제물포를 출발하여 9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보빙사 일행은 워싱턴으로 향하는 열차에서 미국 감리교선교회 임원 존 가우처 목사를 만난다.

가우처 목사는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를 통해 조선선교 전망이 밝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선선교헌금 5000달러를 드린다. 1884년 미국 북감리교회는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와 의료선교사 스크랜튼 박사 그리고 교육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을 조선선교사로 임명한다. 1885년 조선에 들어온 이들은 병원·학교·교회 등을 차례로 설립한다. 스크랜튼 부인은 1886년 5월 31일 한 학생을 데리고 이화학당을 시작하고, 아펜젤러는 1886년 6월 8일 두 학생으로 배재학당을 시작한다. 스크랜튼 박사는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서 일하다가 1886년 6월 15일 시병원을 설립한다.

한양 첫 개신교회인 정동제일감리교회 벧엘예배당.(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한양 첫 개신교회인 정동제일감리교회 벧엘예배당.(사진출처=국립중앙박물관)

1887년 아펜젤러는 스크랜튼 여사 명의로 되어 있는 달성 사택 뒷문에서 돌을 던지면 닿을 거리에 있는 작은 초가집을 산다. 벧엘예배당이라 이름 짓는다. 한양에 세운 첫 하나님의 집이다. 달성 사택은 정동과 진고개 중간쯤, 현재 한국은행 후문 근처 상동이다. 여기에서 10월 6일 첫 예배를 드린다. 11월 근처에 있는 더 큰 집을 사서 예배당을 옮긴다. 큰 방 중간을 기준으로 병풍을 쳐서 남녀를 좌우로 나누고 예배를 드린다. 그해 성탄절 첫 조선어 설교를 한다. 이렇게 한양 첫 개신교 교회, 정동제일감리교회를 시작한다.

고종은 1888년 4월 28일 포교금지령을 내린다. 천주교회는 종현에 명동성당 예배당을 지으려 한다. 십자가 모양 명동성당은 경복궁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서 경복궁을 향하고 있다. 장소와 위치를 바꾸라는 고종의 권고를 무시하고 건축을 강행하자 고종은 포교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게다가 영아소동까지 벌어진다. ‘선교사들이 어린애들을 잡아다가 배재학당 지하실에 가두어 두고 잡아먹기도 하고, 눈알을 뽑아서 약에 쓰거나 렌즈를 만든다’는 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벧엘예배당을 처분한다.

한동안 관망하다가 의주와 평양으로 전도여행을 떠나면서 선교를 재개한다. 1888년 10월 1일에는 아펜젤러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다. 1889년 12월 7일 정동계삭회를 시작한다. 정식 교회로 출범했지만 예배는 남녀 각각 따로 드린다. 강한 유교윤리에 사로잡혀 있는 조선 관료들에게 시빗거리를 만들어주지 않기 위해서다. 정해진 장소는 없었다. 여자는 주로 이화학당이나 스크랜튼 부인 집에서, 남자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집을 거쳐 배재학당에서 주로 예배를 드린다. 이를 통합하여 단일 교회로 합친 것은 1897년 12월 26일 성탄주일 동대문 볼드윈예배당과 함께 벧엘예배당을 헌당하면서 부터다. 명실 공히 정동제일감리교회로 우뚝 선다.

〈대한그리스도인회보〉는 다음과 같이 벧엘예배당 헌당 소식을 전한다. “2년 반에 걸쳐 지은 아름다운 예배당의 길이는 77척이요, 넓이는 40척, 높이는 25척이다. 그리고 종탑의 높이는 50척이다. 회당 안에 좌우로 좁은 방이 하나씩 있는데 그 길이는 28척, 넓이가 14척이다. 지붕은 함석으로 덮이고 사면에 유리창을 단 명랑한 건물이다. 총공사비는 8048.20엔이고, 그 중 조선 교인들이 연보한 돈이 693.03원이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사이 언덕에 정동제일감리교회 벧엘예배당이 있다. 왼쪽 언덕 배재학당 학생들과 남자 교인들은 남쪽 출입문(왼쪽 문)으로 드나들고, 오른쪽 언덕 이화학당 학생들과 여자 교인들은 북쪽 출입문(오른쪽 문)으로 드나들었다. 예배당 중앙에 장막을 쳐서 남녀가 서로 볼 수 없게 했다. 주일이면 청춘 남녀가 중앙에 있는 교회를 향해 몰려드니 연애당이라 불렀단다. 정작 당사자들은 얼굴도 한 번 본 적이 없다. 남녀를 엄격하게 구분했던 예배 공간을 통합한 것은 손정도 목사 재임하던 1915년경이다. 출입문을 두 개로 만들어서 남녀의 출입을 유별하게 했다. 그러나 똑같은 크기와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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