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대 관광경영학과 교수)

존 커티스 크레인 선교사(John Curtis Crane, 1888~1964)는 1913년 순천으로 들어와서 제일 먼저 조선어공부를 시작한다. 1915년부터 매산학교를 맡아서 교육선교를 시작한다. 이 해 4월 일제는 사립학교규칙을 개정하고 종교교육을 금지했다. 크레인 선교사는 성경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일제는 1916년 6월 사립학교규칙 위반으로 매산학교를 강제 폐교한다.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1921년 4월 매산학교를 다시 시작하면서 크레인 선교사가 교장직을 맡는다. 1937년 9월부터 1938년 6월까지 평양신학교 교수로서 조직신학을 가르친다.

1930년대 순천 크레인 선교사 집에 모인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 왼쪽 두 번째가 플로렌스 크레인, 여섯 번째가 존 커티스 크레인이다.
1930년대 순천 크레인 선교사 집에 모인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 왼쪽 두 번째가 플로렌스 크레인, 여섯 번째가 존 커티스 크레인이다.

1940년 11월 16일 219명의 선교사들이 인천항에서 마리포사 호를 타고 미국으로 철수한다. 그중 50명이 남장로교 선교사들이었다. 크레인 선교사는 윌슨 의사 부부, 탈메이지 박사 부부, 메리 닷슨, 플로랜스 루트 등 최후의 7인과 함께 한국에 남는다. 1941년 일제 탄압으로 연금돼 있다가 극적으로 탈출한다. 중국을 거쳐 미시시피로 돌아간다. 1942년부터 미시시피 파스카굴라 제일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한다. 조선이 해방을 맞는다. 1946년 8월 15일 다시 순천으로 돌아온 크레인 선교사는 순천선교부 복구에 매진한다. 제일 늦게 조선을 떠나고 제일 먼저 돌아왔다.

1949년 폐렴에 걸린 크레인 선교사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다. 금방 돌아 올 수 없었다. 1950년 3월 심장 발작이 일어났다. 6월 한국전쟁이 터졌다. 조직신학을 집필한다. 한국어·중국어·일어로 각각 번역되어 신학교 교재로 사용한다. 서울 장신대학교 초청으로 1954년 9월부터 1956년 9월까지 조직신학을 가르친다. 1956년 10월 6일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귀국한다. 다시 한국으로 오지 못하고 1964년 7월 17일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존 커티스 크레인 선교사의 누나 자넷 크레인(Janet Crane)은 전주 기전여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과외로 레슨비를 받지 않고 피아노를 가르쳤다. 공예부 학생들에게는 코바늘과 뜨개질을 가르쳤다. 후기에 순천으로 옮겨서 매산학교에서 1954년 6월까지 교육선교에 전념했다. 첫째 동생 폴 스카켓 크레인 목사(Paul Scakett Crane)는 1916년 목포에서 교육선교를 담당했다.

아들 폴 쉴즈 크레인(Paul Shields Crane, 1919~2005)은 존스홉킨즈대학 의대를 졸업하고 1947년 한국에 들어온다. 전주예수병원을 다시 열어 환자를 돌본다. 미국에서 40만불을 모금하여 전주예수병원을 현대화한다. 1961년, 1965년, 1966년 박정희 대통령과 케네디 대통령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의 한미정상회담을 네 차례나 통역한다. 무엇보다 큰 기여는 1956년부터 1958년까지 36개 병원에 인턴과 레지던트 교육프로그램을 도입한 것이다.
폴 쉴즈 크레인과 아내 소피 몽고메리 크레인(Sophie Montgomery Crane)은 함께 1947년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1969년까지 22년 동안 전주예수병원에서 간호사로 봉사한다. 남북전쟁으로 분열되었던 미국 남장로교회와 북장로교회는 통합하여 1983년 미국 장로교회로 새롭게 출발한다. 1985년 소피 몽고메리 크레인은 미국 장로교회 국제선교부 해외 보건국장에 임명된 남편 폴 쉴즈 크레인과 함께 아시아 10개국과 아프리카 10개국을 순방한다. 남장로교회 의료선교에 참여했던 75명 의료선교사를 직접 찾아가 인터뷰한다. 1881년 미국 남장로교회가 처음으로 의료선교사를 임명한 해부터 1983년 미국 장로교회로 통합할 때까지 100년 남짓 의료선교 역사를 기록한다. 1998년 한 권의 책으로 출판한다.

2대에 걸친 크레인 가문 선교사들은 전통사회 순천에 근대사회를 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순천에 서양식 학교를 설립했다. 교육선교사로 근대식교육을 펼쳤다. 순천에서 우리 야생화를 처음으로 알렸다. 의료선교사로 서양의술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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