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대 관광경영학과 교수〉

광주 양림동 양림오거리에서 양림장로교회 십자가가 높이 보이는 길을 따라 걸어가면 멋진 벽돌 건물이 나온다. 네모반듯한 건물인데, 유난히 문이 많다. 정방형 건물 모서리를 중심으로 좌우를 나눠 남녀출입문을 달리한 ‘오웬기념각’이다. 숭일학교 남학생들은 왼쪽 출입문, 수피아여학교 여학생들은 오른쪽 출입문을 사용했다.

정동제일감리교회는 예배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있는 배재학당 학생들은 왼쪽 출입문을 사용했다. 오른쪽에 있는 이화학당 학생들은 오른쪽 출입문을 사용했다. 군위성결교회 문화재예배당은 아예 정문을 두 개로 만들었다. 오른쪽 정문은 여자가 사용하고 왼쪽 정문은 남자가 사용했다. 양림장로교회 오웬기념각, 정동제일감리교회 예배당, 군위성결교회 문화재예배당 등 장로교·감리교·성결교 3대 교단 모두 남녀 출입문을 달리 했다. 강한 유교윤리에 사로잡혀 남녀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살았던 조선 사람들을 배려한 건축이다.

남녀의 출입문을 각각 따로 만들었던 광주 양림동 오웬기념각의 두 개의 문.
남녀의 출입문을 각각 따로 만들었던 광주 양림동 오웬기념각의 두 개의 문.

오웬기념각은 선교사들이 대장(Captain)이라 불렀던 토목기술자 스와인하트(L. M. Swineheart)가 지은 건물이다. 결원아치창과 주석기둥, 그리고 네덜란드식으로 쌓은 벽돌 등 지금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독특한 서양풍 건물이다. 당시 광주는 물론 인근 고을에서도 구경꾼들이 모여들 정도로 엄청난 건물이었다.

1918년 최흥종 목사의 동생인 의사 최영종과 결혼한 김필례는 1920년 오웬기념각에서 ‘김필례 음악회’를 개최한다. 광주에서 처음 열린 음악회다. 1921년에는 블라디보스톡 교포음악단이 오웬기념각에서 공연을 한다. 남녀가 쌍을 이뤄 사교춤과 탭댄스를 추는 공연이었다. 남녀 출입문이 달랐을 뿐만 아니라 중앙에 휘장을 쳐서 남녀가 서로 볼 수도 없었던 시절이다. 서양문화와 유교문화가 충돌한다.

목사이자 의사였던 오웬은 1898년 선교사로 조선에 도착한다. 1899년 목포 양동에 오웬진료소를 열고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한다. 1900년 정동 언더우드 목사 사택에서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화이팅(Gerogiana Whitting, 1869~1952)과 결혼한다. 1904년 3월 광주에 들러 답사하고 9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2월 15일 임시사택을 완성한다. 성탄절 이브에 유진 벨과 함께 양림동에 도착한다. 성탄절 아침 11시 유진 벨 목사사택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광주선교부를 시작한다. 광주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든다. 서양선교사 집을 구경하러 인산인해를 이룬 것이다. 선교는 순조로웠다. 그러나 1909년 3월 28일 일요일 아침 장흥 전도여행 중 앓아눕는다.

이튿날 조선신자들은 오웬 선교사를 가마에 태워서 산 세 개를 넘어 60리 떨어진 장흥읍에 도착한다. 다음 날 아침 가마꾼을 구해 뛰다시피 해서 130리를 더 간다. 새 가마꾼을 사서 밤새 70리를 또 달린다. 수요일 새벽 2시에 양림동에 도착한다. 상태가 호전되는 듯 했으나 토요일 아침 급격하게 악화된다. 의료선교사 윌슨 의사는 급히 목포선교부에 있는 포사이드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포사이드는 다 죽어가는 한센환자를 자신의 말에 태우고 양림동 언덕에 도착한다. 그러나 오웬은 “나에게 조금만 휴식을 주었으면”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난다.

오웬은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윌리엄 오웬(William Owen) 밑에서 자란다. 오웬은 할아버지 기념병원을 짓고자 했으나 성경을 가르칠 건물이 더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농한기인 겨울에 일주일 또는 한 달씩 성경학교를 열었다. 200리나 300리 떨어진 곳에서 북문 안 양림리교회를 찾아 온 조선신자들은 성경공부가 끝난 뒤 교회 처마 밑에서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서 교회에 다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웬은 무척 안타까웠다. 오웬이 떠난 뒤 미국에서 건축기금 4000달러를 모금하여 조선에 보낸다. 1914년 드디어 오웬기념각을 완공한다. 좌우 출입문 위 현판에 ‘In Memory of William L. and Clement G. Owen’(윌리엄 오웬과 클레멘트 오웬을 기념하며)이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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