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나들이 겸한 역사공부 뜻깊은 시간 ‘일석이조’화사한 봄볕 한 줄기라도 놓치기 아까운 시절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가족과 함께, 혹은 주일학교 반 아이들과 함께 가까운 박물관을 들러 견학하고 주변 산책까지 하는 일정을 잡아보면 어떨까요. 아니면 큰 맘 먹고 봄 정취 가득한 낯선 항구도시로 떠나보는 것도 좋겠네요.마침 가정의 달을 맞아 나들이 기회를 잡기도 좋고, 각 급 학교 중간고사도 끝나는 기간인데다가, 거리두기 방역지침까지 완화된 터입니다. 특히 기독교신앙과 관련된 박물관을 목적지로 정한다면 코로나19 사태 동안 현상유지에 급급
호남선교 개척자로 활약하며 생명 바쳐 한국교회 섬겨“한국만큼 사역자가 필요한 나라가 없고, 한국인만큼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민족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교회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문이 활짝 열렸으니 일어나 일하러 가라. 우리 어깨 위에 이 엄청난 책임이 부과되어 있다!”1891년 10월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는 수많은 젊은 신학생들이 모여, 열정적인 강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6년 전 미지의 땅 한국으로 떠났던 장로교 선교사 호레이스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는 첫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후, 전국을 돌며 젊은 복음사역자들에
4년에 걸친 핍박과 고난 속에도 생명 걸고 신앙지켜길을 재촉하면서도 내심으로는 6·25 당시 그곳에서 순교자가 나왔다는 게 영 납득되지를 않았다. 낙동강 전선으로부터도 한참 남동쪽인 울산에서 대체 인민군들이나 좌익세력이 무슨 수로 활동할 수 있었다는 말일까.하지만 취재 약속장소인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에 가까워질수록 모든 게 확실해졌다. 끝도 없는 험준한 산세가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묵장산과 치술령 등 해발고도 800m에 육박하는 이 산악지대에서는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전쟁 발발 전부터 이곳은 빨치산의 주
선교사들이 첫 발 내딛은 역사의 땅, 그 활기 되살려야그날은 부활절이었다. 1885년 4월 5일,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배에서 내려 제물포 항구에 올라섰다. 미국인 호레이스 언더우드, 헨리 아펜젤러와 아내 엘라 아펜젤러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찾아온 첫 선교사였다.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1가 5-2번지에는 세 사람이 사이좋게 한국에 첫 발을 내딛는 감격적 순간을 묘사한 조형물이 세워져있다. 인천기독교연합회와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가 1986년 건립한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다. 개신교 한국선교의 개막을 상징하는
순교자 묘지는 퇴락했어도 그 정신 여전히 살아임금산을 오르는 과정은 순탄치 않다. 잘 닦인 길은커녕 허술한 진입로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가파른 풀숲을 일행들 전원이 헉헉거리면서 올라간다.비탈 여기저기에는 크고 작은 봉분들이 놓여있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 산을 인근에 살던 경북 청도 사람들은 월봉산이라고도 부르며 공동묘지로 사용해왔다. 우리는 그 속에 숨어있는 묘소 하나를 찾아야 한다.앞장서 걷던 향토문화운동가 김진태 장로(부산 다대중앙교회)의 발길이 멈춘다. 그리고 “여기입니다”라며 그가 가리키
희생과 헌신 순교신앙이 잠잠하던 교회들의 동력을 일깨우다■두 젊은이 희생 딛고 일어선 독천교회독천교회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기 전에 있던 자리는 영암군 미암면 채지리 월창마을이었다. 1930년 미국남장로교 소속 조하파 선교사가 세운 독천교회는 해방 후 온 힘을 모아 월창마을에 목조예배당을 건축했다. 하지만 예배당은 짓고 나서 불과 2년도 채 버티지 못했다. 6·25 발발 후 영암까지 밀고 내려온 인민군들이 예배당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지르는 폭거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가 잃은 건 비단 건물만이 아니었다.더 소중한 젊은 생명
찬송 부르면서 최후 맞은 순교자들 기리며 든든한 신앙공동체 세워■ 호남의 대표적 순교사적지 영암영암군 일대는 6·25당시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며 전남 영광, 전북 김제 등과 함께 호남의 대표적인 순교사적지로 손꼽힌다. 이들 지역은 해방을 전후로 우익과 좌익 사이의 대결이 첨예하게 전개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1950년 전쟁 발발 후 영암에서는 북에서 밀고 내려온 인민군과 지역 좌익세력이 지배하던 약 3개월 동안 여덟 교회에서 89명의 순교자가 발생했다.(2005년 기준) 뒤늦게 발굴된 순교자들과, 잘 알려지지 않은 사례들까
총회역사위원회(위원장:함성익 목사)는 2월 28일 총회회관에서 ‘장로교 뿌리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본 지면에서는 이번 세미나에 소개된 네 편의 강의 요지를 소개합니다. 우리 신앙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있는지 살피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장로교의 뿌리, 칼빈-목회자와 설교자로서의 칼빈을 중심으로정성구 박사(한국칼빈주의연구원 원장)한국의 장로교회는 저마다 칼빈이나 칼빈주의, 개혁주의, 정통이니, 보수니 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칼빈주의 사상이나 삶과 거리가 있다. 한국장로교회
한강 이남 최초 만세운동 주도한 기독인 선각자들 눈부신 기개3·1절 제103주년을 맞으며 국가보훈처(처장:황기철)는 2022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군산 3·5만세운동의 주역이었던 당시 영명학교(현 군산제일고) 교장 윌리엄 린튼 선교사와 교사 이두열 고석주, 애국지사 김수남 등 총 4명을 선정했다.군산 3·5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만세운동이 벌어진지 불과 나흘 만에 전북 군산에서 이어진 것으로,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의 만세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만세운동은 영명학교 교사·학생들
복음의 꽃이 활짝 피어난 원더풀 서울, 그 찬란한 풍경서울역사박물관(관장:김용석)은 올해 1월 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습니다.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 사이 한국에서 활동한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이 직접 서울의 여러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화보집입니다.이 화보집은 미국 뉴저지주 드류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미국연합감리교회 아카이브의 사진 3200건 중 사료가치가 높은 180건을 선별해 수록한 것입니다.그 동안 해당 사진들 중 극히 일부가 한국교회에 입수되기도 했고, 2020년에는 공주와 논산을 중심
위기의 시대 겨레 위해 온 몸 내던진 선배들 애국신앙 되새기다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2년은 4년 전 만세운동으로 촉발된 독립운동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는 기독교인들의 애국신앙이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된 시기입니다. 서울과 평양의 기독인들은 수양동우회를 결성해 조국 광복을 향한 몸부림을 펼쳤고, 기독여성들은 한국YWCA를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해 겨레의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다음세대를 일깨우는 노력들도 계속 이어져 조선소년척후대가 조직되는가 하면,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추진되기도 했습니다. 그 격동의 시기와 기독인 선각자들의
소래교회 전통 계승, 역사의 정통성 이어간다들어가는 말지난해(2021년) 황해노회는 노회설립 110주년을 맞이하였다. 황해노회는 한국 기독교 역사의 젖줄을 품은 노회이다. 조선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첫 선물이 바로 황해도 지역의 교회였고, 첫사랑으로 연합한 노회가 황해노회라 할 수 있다.고신대의 우병훈 교수는 “노회의 사명 중의 하나로서 개체교회를 돕고, 소속 교회들의 통일과 화목과 협력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과연 130여 년의 한국교회 역사 속에서 교회의 연합과 화평을 도모하기 위하여 110년간을 함께
개혁신학 가르침 실천하며 '하나님 주인된 학교' 계승합시다총신 120주년 기획을 마무리하며 학교 수장인 이재서 총장과 대담의 자리를 마련했다. 이 총장은 이번 대담을 통해 “학교 구조의 회복과 함께 재정 건전성의 회복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면서 전국의 교회와 동문들에게 기도와 후원을 당부했다. 대담은 12월 8일 총신대학교 총장실에서 본지 주필 김관선 목사 사회로 진행됐다. ▲개교 12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총신의 수장으로서 개교 120주년을 보내는 소감과, 총회 및 전국교회에 보내는 인사말씀을 간단히 부탁 드립
총신 양지캠퍼스가 위치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일대를 예전에는 ‘양랑’ 혹은 ‘양산’이라 불렀다. 볕에 잘 드는 동네라는 뜻을 가진 ‘양’(陽)자를 그대로 살리고, 그 뒤에 슬기롭다는 의미의 ‘지’(智)자를 붙여 ‘양지’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조선 정종 원년 때의 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가 이곳에 느닷없이 ‘내사’라는 이름을 붙여놓았으나, 국권 회복 후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밝은 지혜의 땅’ 양지에 참 잘 어울리는 총신대학교 캠퍼스가 들어선 것은 1981년의 일이다. 당시 정부가 대학의 지방분산 정책을 펼치던 무
신학과 목회 바른 방향 가리키는 나침반 역할 충실히 감당1. 들어가는 말1901년 5월 15일 마포삼열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2명의 한국인 학생과 더불어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시작되었고, 1948년 남산에 장로회신학교 복교로 계승이 이루어졌다. 이를 계승한 총신이 올해로 개교 120주년을 맞았다.1918년에 이르러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신학 기관지로 을 창간한다. 한자로 ‘지남(指南)’은 남쪽을 가리켜 보인다는 뜻인데, 나침반의 자침(磁針)이 가리키는 방향을 이르는 말이다. 이 단어를 신학 계간지 이름으로 쓰면서, 신학의 방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