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웅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신학과 목회 바른 방향 가리키는 나침반 역할 충실히 감당

1918년 3월 20일 발간된 <신학지남> 창간호(사진 왼쪽). 총신 120년 역사를 돌아본 <신학지남> 2021년 여름호(사진 오른쪽).
1918년 3월 20일 발간된 <신학지남> 창간호(사진 왼쪽). 총신 120년 역사를 돌아본 <신학지남> 2021년 여름호(사진 오른쪽).

1. 들어가는 말

1901년 5월 15일 마포삼열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2명의 한국인 학생과 더불어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시작되었고, 1948년 남산에 장로회신학교 복교로 계승이 이루어졌다. 이를 계승한 총신이 올해로 개교 120주년을 맞았다.

1918년에 이르러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신학 기관지로 <신학지남>을 창간한다. 한자로 ‘지남(指南)’은 남쪽을 가리켜 보인다는 뜻인데, 나침반의 자침(磁針)이 가리키는 방향을 이르는 말이다. 이 단어를 신학 계간지 이름으로 쓰면서, 신학의 방향을 가리켜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기관지가 되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영어로는 “The Theological Review:A Theological and Homiletical Quarterly”(신학 리뷰:신학적이고 설교학적인 계간지)라고 명명했다. 영어 명칭에서 강조되었듯이, <신학지남>은 신학과 더불어 현장 설교의 길잡이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신학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목회현장에서 설교와 목회를 돕는 실천적 기능을 감당하기를 염원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시작된 <신학지남>의 초기에는 주로 선교사 교수들의 번역물들이나 짧은 글들이 수록 되었으나, 창간 후 10년이 지나자 남궁혁 교수를 비롯하여 이성휘 박형룡 교수 등이 임용된 후에는 한인 학자의 글들이 더불어 실리게 된다. 그러나 <신학지남>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가 무기한 휴교에 들어간 이후, 1940년에 이르러 종이 부족을 사유로 역시 폐간을 한다.

그 후 해방과 분단이 되고, 남한에서의 신학교육이 시작되고 나서도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해 <신학지남>의 복간은 미루어졌다. 그러다가 1954년에 이르러 장로회 총회신학교 박형룡 교장의 주도로 드디어 <신학지남> 복간이 이루어졌다. 비록 복간 초기에는 계간 발행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장로회총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나뉘고 난 후에는 정기적 간행이 이루어졌고 올해 가을호가 통권 346권으로 발행되었다.

<신학지남> 디지털 자료를 제공해주는 디피아(Dpia)에 의하면 지금까지 <신학지남>을 통해 공표된 글들은 4770편이나 된다. 이 시점에 올해로 창간 103주년을 맞은 <신학지남>의 역사적 기여가 무엇이었을까 라는 질문이 생긴다. 우리 교단신학교인 총신의 긴 역사와 함께해온 가장 유서 깊은 신학 기관지였고, 신학생들뿐 아니라 목회자들에게도 관심 있게 읽혀 왔다면 그 기여는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2. 초기 <신학지남>(1918~1940)

<신학지남>의 창간 당시 편집인은 왕길지 선교사였다. 창간호 사설에서는 <신학지남>의 의의와 목표하는 바를 밝히고 있다. 왕길지는 성경만이 ‘진지남(眞指南)’이라는 점을 명시하며 “차기보는 성경으로 진남을 삼아 의하여 매기에 특별히 우리 장로교회의 목사와 신학생들에게 신학의 광해(廣海)에 방향을 지남(指南)하려는 목적”을 가진다고 밝힌다.

신학생뿐 아니라 현장 목회자에게 신학적 방향을 지로해 주려는 목적도 가지고 시작했기에, 초기 <신학지남>을 보면 각 신학 분과의 지식 정보를 소개하는 글들과, 강도도형이나 본문 해설 등과 같은 실천적인 글들이 반반이라 할 정도로 동등하게 수록 제공되었다. 초기에는 대체로 선교사 교수들의 번역물이나 짧은 글들이 수록되었고, 시간이 지나가면서 한인 목회자들의 설교나 목회 수기가 간혹 포함되기도 했다.

현재의 신학 잡지 수준에 비교하자면 초기 <신학지남>에는 학술적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글들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신학 저술들이 부족했던 당시 상황에서는 <신학지남>에 수록된 신학적인 글들과 실천적인 글들이 신학생들과 현장 목회자들에게 중요한 자료원으로 사용되었다. 초기 인쇄 부수가 2500부나 되었다는 것이 당시의 높은 수요를 잘 보여준다.

초기 <신학지남>을 통해 전달된 신학의 정체는 무엇일까?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적 정체성을 두고 보수주의 정통주의 혹은 근본주의라고 평가하면서, 개혁주의나 칼빈주의라고 평가하기를 꺼려하는 학자들도 있다. 실제로 칼빈에 대한 글이 <신학지남>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34년(통권 76집) 칼빈 특집호에서이다. 이 특집호에서 박형룡 박사는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글을 투고했고, 그 후 102호와 103호에 김태묵의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글이 또다시 게시되기도 했다.

초기에는 D. L. 무디, 존 녹스, 마르틴 루터,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글들과 성령의 사역에 대한 다양한 글들 혹은 종말론에 대한 글들이 소개되기도 했다. 또한 중국인 신학자 가옥명의 영명생활이 여러 번에 걸쳐 번역 소개되기도 했다. 심지어 칸트나 왕양명과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 소개도 눈에 띈다. 많은 글이 선교지에서 필요한 초보적인 수준의 소개 글들이었다. 사실 본문 속이긴 하지만 출처를 밝히는 글을 처음 쓴 이는 1차 미국 유학을 다녀온 정암 박윤선의 1937년 기고문들에서이다.(‘칼 빨트의 성서관에 대한 비평’ ‘빨트의 계시관에 대한 비평’) 그리고 현대 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 비평적이고 변증적인 글을 쓰기 시작한 신학자는 죽산 박형룡이었다.

<신학지남>에서도 드러나는 초기 장로교회 신학이 영미 장로교회의 정통 신학적 경향을 띠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성경의 영감과 무오에 대해 철저하게 고수하는 한편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뜨거운 사랑, 그리스도의 전천년설적인 재림에 대한 확고한 소망, 성령께서 개인 심령을 회심케 하고 성화시키시는 사역뿐만 아니라 부흥과 영적 각성을 주시는 공동체적인 역사하심에 대해서도 대체로 공유하고 있었다. 초기 <신학지남>의 글들은 어떤 신학자의 신학 사상을 깊이 파고드는 전문적인 연구물들이 아니었기에, 칼빈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글들도 선교 희년이던 1934년부터 간간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3. 후기 <신학지남>(1954~현재)

민족의 격동기 수난사와 함께했던 <신학지남>은 1940년에 부득불 폐간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해방 이후 남한에서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신학적으로 계승하는 신학교가 세워졌지만, 그 기관지인 <신학지남>이 복간되기 시작한 것은 1954년에 이르러서이다.

당시 교장으로서 편집을 맡았던 박형룡 박사는 ‘신학의 지남침은 다시 움직인다’라는 속간사를 썼다.(23권 1호, 1~2) 죽산은 13년 만의 속간을 두고 “하나님의 이상한 섭리의 소치인 동시에 우리 교회의 큰 위안”이라고 소회를 밝혔고, <신학지남>의 기능을 두고 “망망대해에서 선척의 정로를 가리키는 지남침같이, 요란한 사상적 환경에서 신학의 정로를 가리”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재확인시켜 주었다.

어렵게 속간되기는 했지만 1950년대에는 정기적으로 <신학지남> 발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1956, 1957년에는 미간행). 1959년 합동과 통합의 분열 이후, 196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기적으로 간행되는 풍토가 정착되었다. 속간 이후 죽산 박형룡은 1972년 은퇴하기까지 주도적인 기고자 역할을 수행했고다. 명신홍 박사, 차남진 박사, 한철하 박사, 간하배 선교사 등 또한 여러 글을 기고하였다.

현재의 <신학지남> 본문처럼 각주를 달기 시작한 것은 간하배(Harvie Conn) 선교사의 기고문부터였다. 1980년대 후반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신진 학자들이 연이어서 교수로 영입되며, 좀 더 전문적인 신학 연구물들이 <신학지남>에 실리게 된다. 신학의 다양한 분야들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윤리적으로 뜨거운 논쟁거리들(자살, 동성애, 동성혼, 성전환자 등)에 대한 기독교 윤리학자(예를 들어 이상원 교수)의 전문적인 글들도 많이 소개된 것은 지난 사반세기 동안 <신학지남>이 보여준 도드라진 특징 중 하나이다.

초기 <신학지남>이 단 한 번의 특집 외에는 개별적인 글들의 묶음이었던 데 반하여, 1960년대부터는 시의적절한 주제를 중심으로 특집호를 발행한 경우들이 왕왕 있었다. 1962년에 칼빈 특집호가 발간되었고, 1967년에는 미국 장로교회가 만든 신앙고백서의 문제들을 소개하고 비판하는 특집호가 발간되었다. 1974년에는 신학 교육의 재검토를 다룬 특집호가, 1987년에는 예배 신학의 수립에 관한 특집호와 반틸의 서거 기념호가 각기 발행되었다. 1988년에는 박형룡 박사 서거 10주년 기념호가, 1989년에는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특집호가, 1992년에는 총신의 종말론적 전통에 관한 특집호가, 1996년에는 정보화사회와 교회에 대한 특집호가, 1996년(248호)과 1997년에는 교회 내 여성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특집호가 연속해서 출간되었다. 1997년(252호)에는 다시 죽산 박형룡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죽산 기념 신학 강좌 특집호가 발간된다.

그 후에도 ‘신학지남 80주년과 한국교회’(1998년, 254호), ‘한국교회의 급성장’(1998년, 255호), ‘장례 문화’(1999년), ‘평양 대부흥 100주년’(2007년), ‘세월호 참사’(2014년), ‘3·1운동 100주년’(2019년, 338호), ‘가톨릭교회와 WEA에 대한 평가’(2019년, 339호) 등의 특집호들이 발간되었다.

각각의 특집호들은 해당 시기에 논쟁이 되거나 기념해야 할 주제와 관련이 있다. 수많은 개별적 논문들을 통해 신학의 방향을 지로해 주는 역할도 했지만, 이처럼 특집호에 실린 여러 전문가의 기고문들을 통해 독자들은 관련 주제들에 대해 더욱더 풍성하고 전문적인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특집호를 내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있는데, 그것은 교수의 은퇴를 기념하는 경우이다. 안타까운 것은 총신의 신학 정초와 형성 과정에 크게 기여했던 죽산 박형룡, 정암 박윤선, 명신홍 박사, 차남진 박사 등의 은퇴 특집 기념호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러 은퇴 논총이나, 희소하긴 하지만 화갑 기념 논총 등이 간행되었다. 지난 2020년에는 네 번의 발간물 전부가 교수 은퇴 기념 논총이었다. 이러한 특집호에는 총신에서 가르친 해당 교수의 생애와 활동, 그리고 신학 사상 등을 분석 소개하는 논문들이 집대성되는가 하면, 때로는 해당 교수가 속한 분야에 관련된 글들이 수록되기도 한다.

4. 죽산 박형룡의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 전통’(1976)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분명한 기고문은 1976년 <신학지남>에 실린 죽산 박형룡의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라는 글이다.(174호:11~22) 죽산은 글 첫머리에서부터 “장로교회 신학이란 구주 대륙의 칼빈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 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란 이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영미 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에 전래되고 성장한 과정이다”는 선언을 한다.

죽산은 좀 더 상술하기를 “구주 대륙에서 칼빈 개혁주의 신학이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에 치중함으로 출발”하고, 5개 강령을 중심으로 한 칼빈주의 개혁주의가 영국에 건너가서 “열렬하고 심각한 경건으로 받아들이는 교인들이 많아서 청교도(puritan)란 별명을 얻”게 되었고, 그와 같은 청교도들이 마침내 웨스트민스터 회의를 통해 “후일 영미 장로교회 신앙생활의 표준”이 되는 신앙고백 문서들과 예배 모범 등을 산출했다고 말한다.

죽산은 청교도 신학의 양대 특징으로 “성령의 역사의 세밀한 거론과 일요일을 기독교 안식일로 보는 개념”이라고 소개해준다. 죽산은 이 두 가지 특징을 상술하는데, 첫째 특징과 관련해서는 성령의 역사가 특히 전도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주권’ ‘성경의 신성한 권위’ ‘확신 있는 전도의 실천’이라는 세 가지 세목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죽산은 또한 두 번째 특징으로 대륙적 안식일 개념과 달리 “일요일을 기독교 안식일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소개한다. 물론 죽산은 청교도 신학의 특징이 그것들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청교도 신학이 잘 집대성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에 실린 천천의 교훈들이 다 교회의 신앙 지도를 위한 금과옥조(金科玉條)들이었다”고 평가한다.

죽산은 이어서 ‘한국에서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 다룬다. 죽산은 한국 장로교회 선교가 시초부터 청교도 개혁주의를 추구하는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장로교회가 세워질 때도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채용함으로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 위에 법적으로 확립”되었다고 명시한다. 다음과 같은 죽산의 공언(公言)은 매우 유명한 내용을 담고 있다: “대한 예수교장로회는 청교도적인 영미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선교를 받아 출발하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교의와 규례의 표준으로 채용하여 수행함으로 한국에서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의 교회가 된 것이다.”

죽산은 해방 이전 평양 장로회신학교 역시도 이러한 청교도 개혁주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그러한 신학은 ”구주 대륙의 칼빈 개혁주의 신학에 영미의 청교도적 특징을 가미한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라고 명시한다. 죽산은 한국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 전통의 다섯 가지 특징을 특별히 열거하였다. 그 특징 중 앞의 네 가지는 ‘성경의 신성한 권위를 믿는 신념’ ‘하나님의 주권에의 확신’ ‘안식일의 성수와 기도와 예배의 경건 생활에 치중’ ‘성실한 실천’ 등에 있다는 것인데, 구체적인 예들로 헌금의 희생적 봉사, 개인 전도, 주초 금지 등과 더불어 단정한 생활을 힘썼다는 점 등을 든다.

죽산이 제시하는 한국 청교도 개혁주의의 마지막 다섯 번째 특징은 ‘천년기전 재림설’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세대주의(=시대론적) 전천년설이 아니라,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 Premillennialism)이 한국 장로교회의 전통이라는 것이다. 물론 죽산은 ‘교의신학 내세론’(1973)에서는 역사적 전천년설 뿐만 아니라 후천년설이나 무천년설도 양심에 따라 선택 가능하다는 점을 밝히기는 한다. 아무튼 죽산이 정리한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은 서구의 어떤 한 신학 전통에 딱 맞는 것이 아니라, 유럽 개혁주의 전통과 영미 청교도 장로교회 전통의 조화로운 종합으로서 이른바 한국형 개혁주의 정통 신학(Korean Reformed Orthodoxy)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죽산의 전통 이해는 그 후 박아론 교수나 김길성 교수 등에 의해서 긍정적으로 수용되고 계승되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본 항목과 관련된 자세한 논의는 ‘이상웅,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에 대한 죽산 박형룡의 이해, <조직신학연구>38, 2021년:28~64’를 참고하라.)

5.‘총신의 신학적 입장’(1979)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반은 국가적 위기였을 뿐 아니라, 예장합동 총회와 총신의 위기였다고 볼 수가 있다. 비주류의 이탈과 방배동 총신 설립, 총신에서 나간 교수들 중심으로 합신 설립 등 교단과 신학교가 분열하는 아픔을 겪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위기의 시기인 1979년 9월 <신학지남>에는 ‘총신의 신학적 입장’(46/3호, 1979:6~12)이라는 글이 게재된다. 총신 교수 일동의 이름으로 발표된 입장문이다.

글을 시작되면서 총신 교수들은 “최근 총신이 좌경화되어 간다는 교계 일부의 오해를 해소시키며 한국교회의 올바른 진로를 제시하기 위하여 우리 총신 교수 일동은 교회 앞에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과 복음주의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총신의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가를 이제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사료”된다고 문건 작성의 이유를 밝힌다.

첫째로 총신의 신학은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 신학의 근본적 특징인 성경의 권위를 높인다”라고 천명했다. 구체적으로는 성경이 “신학의 객관적 원리”이며, 유기적 영감과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각 항목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입장문을 전개한다.

1930년대 평양신학교 도서실 풍경.
1930년대 평양신학교 도서실 풍경.

두 번째로 총신 교수들은 “개혁주의 신학의 본질적 특징인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라고 선언한다. 세 번째로 “구원의 은혜성을 충분히 나타내 주고 있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은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서 나왔다”라고 밝힌다. 이어서 구원은 신인협력적인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독 사역임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네 번째 항목은 교회론적인 고백으로서 “부르심을 입은 신자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가 머리되심을 우리는 믿는다”라고 공표했다.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시라는 점과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기관임을 인정하면서도, 교권주의와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동시에 교회의 내재적 불완전성과 계속적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조항은 “개혁주의 신학의 실제적 특징인 적극적 문화관과 사회봉사”에 대한 강조를 담고 있다. 이는 개인의 심성이나 종교적 활동의 영역에만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실현된다고 주장하며 사회와 문화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하는 입장을 배격하고, “생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이 실현되기 위해 힘쓰는 개혁주의적 생활관을 강조”하는 입장이 개혁주의적인 입장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내용을 중심으로 총신 교수들은 외부로부터의 오해에 대항하여 총신의 신학적 입장이 무엇인지를 명시적으로 밝혔고, 그것을 <신학지남>을 통해 만천하에 공표했다.

6. 나가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예장합동의 교단신학교인 총신 120주년을 맞이하여 신학 기관지인 <신학지남>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더욱 자세한 내용은 ‘김길성 교수, <신학지남> 100년의 역사와 신학, 신학지남 334호, 201년:7~61’과 그 논문 각주 1에 소개된 다양한 자료들을 찾아서 볼 것을 권하고 싶다). 국내에서 발간된 신학 잡지 중에 <신학지남>처럼 103년의 역사를 가진 경우도 찾아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고, 일관되게 개혁주의 혹은 죽산의 말대로 청교도 개혁주의를 표방하고 지켜온 경우도 드물 것이다. <신학지남>은 한국사회가 겪은 영욕의 세월을 함께 했고,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와도 함께 하며 자기 자리를 지켜왔다.

초기에는 신학적인 ‘지남’의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목회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한국 목회자들에게 설교 모범, 성경 해설, 실천신학적인 자료들을 제시함으로 신학적으로나 목회적으로 바른 방향으로 지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54년에 속간된 후에도 많은 신학적인 문제들과, WCC나 1967년 새로운 신앙고백서 등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들을 제시하고 바른 방향을 적시해 주기도 했다. 1980년대 후반 이래 총신의 교수진은 더욱 전문성을 띤 학자들로 채워지게 되므로 <신학지남>에도 각 분야별로 전문적인 지식들을 담은 논문들이 많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신학지남>은 103년 전이나 현재나 여전히 정통 개혁주의 신학의 분명한 노선을 취하고 있고, 현실적으로 심각하게 제기되는 사안들에 대해 답변을 제시하는 글들이나 특집호들도 만들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신학지남>은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에 근거한 전문적인 주제의 글들뿐 아니라 21세기 사회와 교계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현안들에 대해 신학적으로 바로 분석하고 비판해 주되 대안을 제시하는 글들 또한 많이 게재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신학지남>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교단 내 목회자들과 당회가 관심을 가지고 정기구독하는 운동이 일어나는 것도 필요하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문의 031-679-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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