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한국교회 문화유산 답사기 ⑫ ] 강화도
[연속기획/ 한국교회 문화유산 답사기 ⑫ ] 강화도
  • 송상원 기자
  • 승인 2011.08.23 15: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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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은 온통 한국교회 문화박물관

‘근대선교 중요 거점’ 알리는 유적 곳곳에…많은 건물 ‘토착화’ 고민 담아
성공회강화성당 지나 강화중앙·교산교회 방문하면 시간은 멈춰선다


①인천광역시 유형문화제 제41호 지정된 온수리성공회성당 사제관.
②111년 전 모습 그대로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는 성공회강화성당 내부에서 깊은 정감이 묻어난다.
③홍의교회 역사자료실
한국 선교 시작점 인천의 문화유산을 둘러 본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강화도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서해바다와 만나는 물머리에 강화도가 있다. 백두대간의 중간에 위치한 강화도 마니산은 국토의 배꼽에 해당하는 곳으로 서울에서 넉넉잡아 1시간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역사적인 유물이 많아 한국 역사의 축소판 같다는 강화도는 기독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선교지로서 강화도는 서울의 관문이면서 경기도와 황해도까지 뻗칠 수 있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 복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곳에 기독교문화의 대표적인 유산이 숨쉬고 있다.

 

성공회강화성당

우리는 강화대교를 지나 강화읍으로 향한다. 강화읍을 관통하는 48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읍내 중심가 오른편에 위치한 방주 모양의 한옥 건물 성공회강화성당을 만날 수 있다. 1900년 초대 고요한 주교가 축성한 성공회강화성당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한국 기독교 역사의 소중한 자원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종각에 범종이 있고 강화성당이 고귀한 자태를 드러낸다. 궁궐 도편수가 주도한 지붕 모습이 경복궁을 닮았으며 지붕 위에 작은 십자가가 수줍게 솟아 있다. 배 모양의 성당 터는 세파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방주로서 역할을 나타낸다.

성공회강화성당에는 조선의 전통문화와 기독교 서구문화의 조화가 건물 곳곳에서 발견된다. ‘절 같은 성당’이란 느낌을 주는 본당의 건물외형은 전통한옥 기법을 따랐으나 건물 내부는 서구교회의 바실리카 양식으로 건축했다. 이는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활용한 기독교의 초기 토착화 모습을 잘 보여준다. 본당 주위에 있는 조경에서도 토착화를 추구했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현존 한옥성당으로 최고(最古)인 성공회강화성당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424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성공회강화성당의 내부는 고풍스러움의 극치다. 성당을 지지하는 나무기둥과 111년 그대로 사용 중인 의자, 짙은 나무색이 풍기는 그윽함은 옛스러움을 넘어 말로 표현 못할 감격으로 다가온다. 이토록 온전히 보존되어 고맙다고, 이곳에 찾은 것이 너무 잘한 일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강화중앙교회·홍의교회

강화읍에서 방문한 두 번째 유적은 국도를 사이에 두고 성공회강화성당과 마주보고 있는 강화중앙교회다. 강화중앙교회는 주선일, 박성일 등이 강화읍 천교하의 여섯 칸 반짜리 초가집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존슨 선교사의 협조로 기와집 25칸, 초가집 16칸을 구입하여 현 위치로 옮겨 강화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예배당을 마련하게 됐다. 누에머리를 닮은 잠두 언덕배기에 위치해 설립 초기에는 잠두교회라고 불렸다.

2000년에 완공한 현대식 성전이 하늘 높이 솟아 위용을 뽐낸다. 교회 본당 입구에 위치한 교회 역사관에서 초가로 지은 초기 예배당의 모습과 100년 이상을 지내온 교회의 역사 유산을 엿볼 수 있다.

강화중앙교회는 1세기동안 강화지역 복음화의 선구자 역할을 해왔다. 1904년 월곶교회 개척을 시작으로 26개의 교회를 개척하거나 설립에 도움을 줬다. 더불어 강화중앙교회는 민족과 어우러지며 발전한 지역의 구심점 역할마저 해냈다. 강화진위대장 출신 민족주의자 이동휘가 권사로 헌신했고 일제에 대항하여 신앙을 지키다 더리미해안에서 순국한 김동수 권사와 형제들이 이 교회 출신들이다.

강화읍을 벗어나 바로 옆 송해면으로 향하자. 강화도에 세워진 두 번째 교회가 반겨 주었다. 바로 홍의교회다. 홍의교회는 한학자 박능일이 1896년 선교사의 도움 없이 예배당을 건축했고 1년 만에 성도가 80명을 넘어 교회 부흥의 열정과 가능성을 보여줬다. 특히 홍의교회 교인들은 그들만의 끈끈한 신앙공동체 의식을 표현했는데 그것은 검은 옷 입기와 개명 운동이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의미로 교인들은 흰옷에 검은 물을 들여 옷을 입고 다녔다. ‘믿음 안에서 하나’라는 뜻으로 교인들은 이름의 돌림자를 한 일(一)자로 개명했는데 이는 한 형제라는 기독교의식을 한국의 고유문화양식으로 나타낸 토착화 작업의 시작이었다. 홍의교회를 마주한 첫 느낌은 그냥 조그마한 시골교회 같다는 느낌이지만 교회 내부에는 제법 그럴싸한 역사자료실이 자리해 있다. 1899년에 기증된 구약촬요와 옛 성경, 문서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특히 23대 담임 한성수 목사가 교회를 찾는 이들에게 홍의교회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소개하고 있어 더욱 정감이 간다.

④강화지역 복음화에 선구자 역할을 해온 강화중앙교회 전경.
⑤강화지역의 모교회 교산교회에는 1959년에 건립한 옛 예배당과 2003년에 세운 신축 예배당이 공존한다. 이전 예배당은 박물관으로 쓰일 예정이다.
⑥강화도 최초의 석조예배당 흥천교회와 교회탑.

모교회 교산교회·흥천교회

이제 강화지역의 모교회 교산교회가 있는 양사면으로 출발한다. 하점면을 거쳐 우측으로 갈라지는 덕산리 방향으로 오르다보면 이정표가 나온다. 양사면사무소를 찾아 가다보면 도로변의 강화도로전래기념비가 교산교회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교산교회는 강화지역의 어머니 교회로 강화의 기독교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서양과 싸움으로 시달림을 겪어 왔던 강화도는 선교사들도 입성하기 어려웠으나 우연한 곳에서 기독교 전파가 시작됐다. 양사면 교산리 출신 이승환이 인천 내리교회를 다니다가 고향에 돌아와 노모를 모시고 살았는데, 모친이 노약해지자 내리교회 존스 목사에게 세례를 요청한데서 비롯되었다. 존슨 선교사는 이승환 모친을 배위에서 세례를 주어 1893년 강화 최초의 세례자가 나왔다. 그해 제물포 교인 이명숙이 강화 담당 전도인으로 파송되면서 이승환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고 시작한 것이 강화 최초의 신앙공동체의 탄생이다. 이어 한학자 김상임 일가족이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교인수가 급격히 늘어 교회위치를 다리목으로 옮겨 12칸짜리 독립된 교회당을 마련한 것이 교산교회의 시작이다.

현재 교회 터에는 2003년 봉헌된 현대식 예배당과 예전 예배당이 공존하는 가운데 교회 설립자 김상임 전도사 공덕비, 오래된 종탑, 김상임 전도사 생가 등이 존재해 시간을 되돌리는 공간이다.

절경이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따라 양도면 삼흥리로 내려가자. 1906년에 설립된 흥천교회가 맞이한다. 양도초등학교 옆 한적한 교회입구에 걸려 있는 낡은 교회 간판이 시골교회임을 말해주는 곳. 입구를 지나면 1938년 세운 강화지역 최초의 석조예배당이 반긴다. 담쟁이 덩쿨이 뒤덮고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교육관을 채우고 있는 역대 담임목사들의 사진과 넒은 교회 앞마당에 교회설립기념비, 교회 100년을 기념한 선교백년비가 이곳에 기독교문화유산임을 알린다.

 

성공회온수리성당

강화도 여정의 마지막 유적지는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성공회온수리성당이다. 1906년 건립된 한옥성당인 온수리성당은 강화읍성당과 비교했을 때 소박한 느낌을 준다. 규모면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으며 지붕도 단층 팔각지붕으로 평범하다. 성당 내부도 열두 사도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나무 기둥으로 지성소와 회중을 구분할 뿐이고 지성소의 면적이 전체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온수리성당이 소박한 회중중심의 교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온수리성당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됐고 성당 옆 사제관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이름을 올린 한국 기독교문화유산의 자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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