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권희 목사(신일교회)

유일한 구원자, 그리스도 부활을 선포합시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막 16:6)

이권희 목사(신일교회)
이권희 목사(신일교회)

20세기를 대표하는 복음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우리는 성경을 변호하기보다 더 많이 선포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며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케리그마는 본래 ‘전파하다’ ‘선포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로 신약성경에 약 61회 사용됐습니다. 케리그마는 이미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사상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디다케’와 구별됩니다. 케리그마의 핵심이 뭘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독생자며 유일한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케리그마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그렇게 선포한 사람이 나옵니다. 마가입니다.

마가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많은 내용을 적지 않았습니다. 8절밖에 되지 않습니다. 마가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기록한 것을 보면 갑자기 급하게 썼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급하게 선포해야 할 사건이 바로 부활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야말로 자신이 선포할 케리그마라는 것입니다.

1절에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두었다가” ‘안식일이 지났다’는 말은 안식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때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 이렇게 세 여인이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갑니다. 당시 사람들은 부패해 가는 육신의 악취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싼 천 위에 기름을 쏟아붓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세 여인은 무덤에 가면서 입구를 가로막은 큰 돌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우리를 위해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줄 것인가”라고 걱정했습니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이 무덤을 인봉한 사실도 몰랐습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엄청나게 큰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신은 없어지고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흰옷 입은 청년은 천사입니다. 그 천사가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여인들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마가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너무 전하고 싶었습니다. 마가의 마음이 너무 크고 뜨거웠어요. 마침내 그것을 선포합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의 케리그마’입니다. 마가는 이 사실을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이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사자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마가복음을 쓴 마가가 사자와 같아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마가복음을 사자의 복음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마가는 왜 이렇게 부활을 급하고 장엄하게 선포할까요? 사실 마가에게는 남에게 숨기고 싶은 실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로마 병정들의 손에 잡혔을 때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14장 51~52절을 보면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과연 이 청년이 누구인가? 당연히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벌어지겠지요. 그런데 이 청년이 바로 마가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당시 12사도는 그리스도를 버리고 도망간 후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청년에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 수 있었을까요? 자신이 아니면 모르는 일입니다. 그는 젊었을 때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겁이 나서 비겁한 행동을 했습니다. 주님을 알았지만 도망을 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후에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변화합니다. 그는 도망자 비겁자였는데 복음을 전하는 자로 변화됐으니 그 감격이 얼마나 컸을까요? 제가 보니 예수님을 믿기 전에 실수를 많이 하고 소위 막되게 행동했던 분들이 예수를 만나면 감격이 크더라고요. 왜냐하면 체험이 있거든요. 마가가 예수님을 만난 감격을 가지고 쓴 책이 바로 마가복음입니다.

현대인이든 고대인이든 많이 배웠든 그렇지 못했든 부자건 가난하건 분명한 사실 하나는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그 말은 다시 살고 싶은 마음, 욕망이 숨어 있다는 말입니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췌장암으로 투병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의 평생 축적된 이 모든 경험이 그냥 없어져 버린다고 생각하면 이상하다. 그래서 나는 뭔가 살아남는 게 있다고 어쩌면 우리 의식이 지속될거라고 정말 믿고 싶다.” 그에게도 영원에 대한 소망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현대인들의 내면에는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이 잠재해 있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은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분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은 두 가지 죽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실적 죽음’과 ‘실존적 죽음’입니다. 사실적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될 때 찾아옵니다. 이것은 개인의 종말입니다. ‘실존적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로 시작됩니다. 실존적 죽음으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됩니다. 그래서 현재 겪는 온갖 종류의 재난과 고통, 비극을 초래하게 됐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도 부활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만약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했을 거라고 합니다.(고전 15:13) 또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했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믿음도 헛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또한 자신의 부활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의 케리그마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존 칼뱅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을 ‘신앙과 희망’ 그리고 ‘사실과 경험’이라는 이중의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신앙의 관점’은 ‘아직 있지 않은 것을 보는 관점’입니다. 지금은 없어도 믿음을 가지고 아직 있지 않은 현재를 견딥니다. 이 관점은 그래서 ‘희망의 관점’이라고 부릅니다. 사실의 관점은 부활을 사실로 느끼고 확인하는 관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험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이 두 가지 관점이 모두 필요합니다.

내가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다른 무엇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교인 중에 부활을 믿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죽으면 끝이다’ 혹은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다른 세계는 없다’라는 등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가 믿을 것은 예수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선포해야 할 케리그마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한계인 죽음을 이기게 하는 능력입니다. 우리의 절망에 대한 절대적인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부활하셨기에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만 다시 살아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것은 케리그마입니다. 우리가 선포해야 할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