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선 목사(주필)

난 18층 아파트의 17층에 거주하고 있다. 따라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오르고 내릴 때마다 엘리베이터에 머무는 시간은 불과 몇십 초밖에 되지 않는다. 현대문명의 편리함을 느끼지만, 때로는 짧은 그 시간의 지루함과 답답함으로 힘들 때가 있다. 대개 같은 통로에 사는 이웃들과 마주할 때다. 17층이라 피할 수 없는 이웃이 많다. 그들을 만나면 늘 웃으며 인사를 하곤 한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 좁은 공간에서 함께하는 시간은 매우 길게 느껴진다. 그러나 웃으면 인사와 대화를 나누는 이웃을 만나면 그 시간이 짧아 아쉽기도 하다.

또 어린아이들과는 먼저 웃으며 ‘안녕’해 줄 수 있고, 심지어 애완견에게도 웃음을 주는데, 중고생이나 청년일 경우는 말 거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들의 반응이 두렵기 때문이다.

정원 12명인 좁은 공간에서 도망갈 곳도 없으니, 그가 빨리 내리길 바랄 뿐이다. 멋쩍어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기도 한다. 함께하는 시간이 3~5층 정도일 때는 그나마 다행스럽지만, 10개 층 이상을 함께 갈 때의 그 적막함과 낯섦은 매우 힘들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익숙한 목회자로 살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기술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다.

길거나 짧다는 것은 상대적이다. 누구와 함께 있는지, 그리고 어떤 관계인지에 따라 다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의 칠십 가까운 인생살이에서 얼마나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보냈는지 계산해 본다. 그리고 지루하지 않은 시간을 만들어 준 사람들이 참 고맙다. 또 여전히 곁을 지켜주는 그들에게 미소를 보낸다. 고마운 이들이다. 내가 누구라고 곁에 있어 주고, 늘 격려하며 힘이 되어주는지 고맙기만 하다.

그런 생각을 해보니, 난 이웃에 얼마나 즐거움과 편안함을 주며 살았는지 점검하게 된다. 목회자로 긴 세월을 살다 보니, 내 정체를 알면서 스치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거나 지루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제라도 나를 더 편하고 즐겁게 만나게 해야 할 텐데, 여전히 누군가에게 어려운 존재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불편하다. 주님은 나를 늘 편하게 하시는데, 난 그렇지 못한 것 같고 또 짧은 시간을 지루하게 만드는 기술을 쓴 것은 아닌지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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