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올해의 사자성어’(四字成語)를 선정해 발표했다. ‘견리망의’(見利忘義)가 그것이다.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는다’는 뜻이다. ‘각자 자신의 이익 찾기에 급급해 의로움을 버리는 사회’, 우리 사회 전체가 공동체성을 잊어버린 채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공멸(共滅)의 길이다.한국교회는 여기에서 예외일까?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중심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지 이미 오래됐고, 이젠 ‘각자도생’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지경에 이르렀다.한해를 마감하고 새해
교회사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사람들, 곧 교회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복음의 은혜와 능력과 영광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울러 교회사는 여전히 그 은혜의 수혜자들이 좌우로 치우치는 진자 운동의 실상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은혜의 방편으로서 최고의 제도인 ‘설교’에 있어서 ‘우로나 좌로 치우지 말아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교리’와 ‘삶’의 두 요점은 모든 설교가 견지할 진수적 요소임을 누가 부인하랴. 교회사 속에서 찬란한 영적부흥과 각성 시대의 대표적인 설교들은 한결같이 ‘구원의 교리’와 ‘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몇 사람을 들자면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루터와 칼빈일 것이다. 1세기의 바울과 4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와 16세기의 루터와 칼빈의 신학이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필자도 하나님의 섭리로 약 35년 전에 그들의 신앙과 신학을 접할 수 있었다. 나의 스승 고(故) 이금용 목사님을 만나 ‘구속사적 관점으로 본 성경 공부’를 했고, 프란시스 쉐퍼의 사상을 접하였고, 김홍전 박사의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성을 공부하게 됐다. 총신대학원에서 만난 서철원
12월이면 언제나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열심히 살았노라고 하지만 딱히 해놓은 것은 없이 그냥 한 해가 지났기 때문이다. 막연한 덧없음 속에 인생은 그렇게 또 흘러가리라는 패배감마저 찾아든다.사람들은 이런 패배감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보다. 성탄을 알리는 트리의 불빛과는 부조화하지만, 술과 파티로 연말을 보낸다. 독주(毒酒)를 마시며 지난 시간들을 망년(忘年)해 보려고 한다. 물론 그런다고 모든 것이 잊혀지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소망들을 가져보는가 보다.독주라는 단어, 참 재미있다. 그 뜻이 참으로 많다.
108회기 총회가 하는 “교회여 일어나라”라는 운동이 지금처럼 ‘성장과 부흥’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교회로는 제발 일어나지 말았으면 한다. 그렇게 대형교회를 꿈꾸는 교회로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회는 너무나 세상적이고 또 세속화됐기 때문이다. 성장과 부흥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복음은 진부해졌고, 신앙은 상품화됐으며 신학은 이미 삶의 체계로서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1세기의 교회, 그 원형의 교회로 일어나야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운 교회로 일어나서 사도행전 17장 6절의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교회가
퇴임 후 국민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이라는 칭송을 듣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은퇴 후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 는 기자의 질문에 “교회주일학교의 교사로 돌아가는 것” 이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세계 최고 강대국의 대통령으로 있으면서도 그는 어린이와 장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회 교사의 사명을 귀한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교회에 출석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줄어드는 것은 이 땅의 교회가 피부로 느끼는 현실이다. 출산률의 저하와 교회 구성원들의 연약함 그리고 교회를 대하는 세상의 싸늘한 시선이 큰 이
감기에 걸려 편도선이 부으면 침 삼키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도 힘이 든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정도의 아픔 때문에 비관하거나 인생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곧 나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고, 신체에 감각이 없고, 음식물을 먹지 못하는 등의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고 감사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1995년 12월, 라는 잡지의 편집장이었던 장 도미니크 보비는 갑자기 뇌졸증으로 쓰러지면서 왼쪽 눈 하나를 빼놓고는 전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다. 그가 대
영적 지도자는 눈앞에 보이는 세상적 가치보다 하늘나라의 상급을 바라보는 성숙한 영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하나님이 108회기를 맞아 많은 이들을 총회의 지도자로 세우셨다. 수많은 지도자가 상비부와 특별위원회, 그리고 기관에서 일하므로 교단이 부흥하고 한국교회가 건강해질 것을 생각하면 감사하다. 교단의 여러 리더는 대개 오랫동안 교회와 노회, 지역사회를 섬기며 총회를 위한 봉사 경험도 많은 분들이어서 기대가 크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약한 사람들이다.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하므로 교단에 손해를 끼치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쇠사슬에 묶이지 않은 영원한 영혼이여지하 감옥의 가장 맑은 곳, 자유여누구도 이 흔적을 지우지 마라!그것은 폭군에 항거하여 신에게 호소한 자국이리니”(바이런, Byron)위의 시의 배경이 되는 ‘시옹성 지하 감옥’은 종교개혁 당시 스위스의 개혁자이자 제네바의 수도사였던 프랑시스 보니바르(Francois Bonnivard, 1496~1570)가 사보이 백작에 의해 구금돼 6년간의 옥고를 치러 유명한 곳이다. 시인 바이런은 훗날 스위스를 여행하면서 이 성의 지하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여 고통받던 보니바르를 떠올리며 시를
근자에 어떤 분이 ‘신학은 완전하지 않다’는 발언을 했다. 정당한 신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라면 받을 만하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가 의존하고 견지해 온 교리체계가 비성경적이고, 내가 이해하고 주장하는 바가 성경적이다’는 식의 뉘앙스를 가진 표현이라면 힘이 없어진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자기 블로그에서 자기 주장과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의 실명을 밝히며 ‘아무개는 이단’이라고 정죄한다는데, 가히 그것은 극한 명예훼손이요 신학의 공론적 특성을 무시한 진기 없는 공언(空言)일 뿐이다.‘신학은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이
지난 9월 19일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지나 2023년을 보낸 한국교회가 새롭게 진입하게 될 2024년을 어떻게 사역해야 할 것인가를 내다보는 가 발간됐다. 책 속에는 2023년을 분투하고 있는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리서치한 결과를 데이터화한 것에 기초해 현재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그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대표 저자인 지용근 목회데이터연구소 대표는 한 마디로 2024년은 ‘교회수축시대’라고 어둡게 전망했다.이런 상황 속에서 각 영역에서 전문성을 가진 저자들이 10차례에 걸친
지구는 지금 인간의 탐욕과 욕심으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기후변화, 지구온난화, 온실가스, 탄소중립 등 다소 생소한 단어들이 지난 세기말부터 금세기 들어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생태학적 위기의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이런 주제들에 대해서 모른 체하고 지나칠 수가 없다. 지구의 번성이 인류가 생존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빈번하게 경험하는 폭우, 폭염, 폭설 등의 기상 재해 또한 화석 연료를 무분별하게 사용해 지구를 뜨겁게 한 우리의 탐욕의 결과이다.이런 지구적인 기후환경 위기 상황
“교회여 일어나라”라는 표어 아래 모였던 제108회 총회가 나흘간의 회무를 마치고 파회했다. 총회 준비위원회와 새로남 가족들은 명품총회를 만들기 위해 “정책총회, 개혁총회, 환대총회, 칭찬총회”를 표방하며 그들의 수고를 다 했다. 이제 회의에 대한 평가는 총대들과 총회 구성원들의 몫이다. 임원진을 비롯한 총회 일꾼들은 들려오는 평가내용을 풀어가야 할 숙제로 받아들여야 한다.역대 총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 총회에서도 특별히 민감한 사안이 아니라면 대부분 안건이 총회장의 의지를 따라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일반 총대들로서는 헌의안에
사건은 지속되는 시간을 예리하게 분절시킨다. 그뿐 아니라 방향을 잡을 수 없는 시간이 된다. 왜냐하면 사건 속에는 의미가 묻혀 있고, 법규들은 죽은 채 나뒹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죽은 법규 하나가 살아 나와서 양심이 더러워진 자와 손을 잡으면 그 사건은 불시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더러워진 것으로 끝장내는 가장 더럽고 비열한 폭력이 된다.본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센세이션적인 폭력에 죽으면 억울하여 말을 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고, 자살로 위장된 억울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항상 자살로 위장된
총신은 사립학교법의 지배를 받지만, 더 우선적으로 교단 산하의 신학교이다. 교단의 지도와 감독을 받아야 하며, 그 목적이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 갈 목회자와 기독교 지도자를 양성하고, 교회를 세우는 개혁신학의 산실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샘을 찾는 것은 꽃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목마름을 해결하는 물을 얻기 위해 샘을 찾는 것이다. 총신의 존재 목적, 그리고 정체성은 바로 교단의 목회자, 기독교 지도자 양성과 교회를 건강하게 세울 개혁신학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졸업생을 배출하고, 아무리 훌륭한 건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