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기 목사(이천은광교회)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부흥 큰비 내린다

어느 시대나 부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반드시 있었다. 바로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우상들이다. 우리 대부분은 코로나19 시대에 예배를 지키기 위한 차선책으로 영상예배를 도입했다. 이 예배형식은 비상한 시기가 끝날 때까지 사용해야 할 한시성을 담보한 문명의 편의장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편리한 도구를 떼어놓지 못한 채 여전히 만지작거리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불편하더라도 기꺼이 순종하려 할 때 부흥은 온다. 하나님의 뜻보다 우선순위에 놓는 것은 우상이다. 지금 이 시간 부흥을 가로막는 장애물 앞에서 머뭇거리는 우리에게 엘리야의 믿음은 큰 도전을 준다. 아합이 통치하고 있는 북이스라엘은 3년간 가뭄은 물론 영적 가뭄도 동시에 겪고 있었다. 그 원인은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용납했기 때문이었다. 아합 왕실은 우상숭배 권장 정책을 펼쳤고 백성들은 그대로 수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엘리야는 아합 왕실의 불신앙을 책망했다. 그리고 나라를 살리고 죽이는 것이 바알과 아세라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고 우상을 숭배한 대가는 사막의 땅에 이슬조차 내리지 않는 가뭄의 심판과 그로 인해 당하는 처절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가장 어두울 때 하나님께서 찾아왔다. 처절한 가뭄 3년 끝에 비를 내려주겠다는 약속이다.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라는 명령은 지금껏 하나님의 때가 될 때까지 아합을 피해 숨어 지내던 엘리야에게 “이제 부흥의 때가 되었으니 정면승부를 하라”라는 사명의 수여이기도 했다.

이것은 부르심이었다. 엘리야는 즉각 죽음의 고통을 끝내는 것이 영적 부흥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진단했다. 하나님이 진노하신 원인인 악과 우상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영적 부흥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지독한 가뭄을 끝내는 것임을 알았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을 펼친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제단에 불로 응답하셨고, 부흥을 가로막는 원인인 우상숭배 전파자들을 심판했다.

이처럼 부흥을 갈망하는 어느 시대나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우상들이 먼저 제거됐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이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부흥을 갈망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제거해야 할 장애물은 무엇인가. 교회 내적으로는 공동체가 서로 일치하지 못하게 만드는 시기와 다툼, 교회와 지도자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분열에 이르게 하는 것, 현장 예배를 뒤로 하고 영상예배에 머무는 영적 게으름 등이 있다. 교회 외적으로는 차별금지법 입법을 통한 동성애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위에 인권을 두려는 시도 등이다.

이제 우리는 부흥을 갈망하는 교회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시는 “부흥의 장애물을 제거하라”라는 명령을 수행할 때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치열한 영적 싸움으로 우상을 제거했다. 그리고 부흥의 시대를 열기 위해 또다시 무릎을 꿇고 담대히 기도했다. 우리 총회는 영적 침체의 골짜기에서 가장 먼저 담대한 기도를 했다. ‘은혜로운 동행 기도’는 그 자체가 도전적인 엘리야의 기도와도 같다.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갈멜산의 기도이다.

전국에서 많은 지도자들이 기도했고, 교회들이 기도했다. 오직 하나님 앞에 머리를 조아려 경배하면서 오직 주님만 의지한다고 고백하여 기도를 드렸다. 한동안 끊어졌던 부흥의 불씨가 되살아나는 강력한 경험을 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부흥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를 시작했다는 그 자체가 손바닥만한 구름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손바닥만한 구름에서 무엇을 보이는가. 곧 폭포수처럼 쏟아질 큰비가 보이지 않는가.

무릎을 꺾고 또 꺾을 때 인간은 인간의 자리로 되돌아오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로 높임을 받는다. 이것이 부흥의 전조다. 이번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서 우리 함께 손바닥만 한 구름을 보길 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더 크게 일어나는 영적 부흥의 실제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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