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응렬 목사(와싱톤중앙장로교회)

회개와 기도로 하늘의 문을 엽시다

기독교는 ‘기도’교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해도 기도가 부족하다면 영적 빈혈에 걸린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기도의 수혈이 절실합니다. 영적 광야를 걷는 한국교회가 기도의 무릎을 꿇을 때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체험할 것이고, 사방이 막힌 홍해 앞에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을 때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기도의 눈물이 마룻바닥을 적신 흔적을 갖고 있습니다. 하늘을 울린 눈물의 기도로 일제시대와 6·25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세상을 놀라게 한 교회로 자라왔습니다. 오늘날 모두가 위기라고 말하는 이때, 위기를 극복하고 기쁨의 생수를 마시게 할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영혼이 살아나고, 교회가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 위기에 놓여 있을 때, 사무엘은 이 전쟁이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여시고 은혜를 주셔야 승리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게 하는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전쟁의 상황에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의 품위를 상실하고 우상에 머리를 숙인 사람들, 그들에게 영적 전쟁 앞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하고 거룩함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죄를 품은 사람을 통해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늘의 문을 열기 위해 내가 회개해야 할 것,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회개가 없는 곳에 하늘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하늘의 문을 여는 두 번째 길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5절) 사무엘의 위대함은 문제의 핵심을 알았다는 것이고, 더 큰 위대함은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갔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풍요를 줄 우상을 섬겼지만 그들의 문제는 먹고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거룩함을 상실한 것이 근본 문제였습니다.

전쟁 앞에서 백성들의 반응은 이랬습니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6절) 전쟁을 앞에 놓고 금식하는 것은 전쟁을 모르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기회를 놓칠 리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치러 왔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세상의 방식으로 싸우지만, 영적 전쟁에 임하는 신앙인에게는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의 환경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리고 순종합니다. 두려워 떠는 백성들 앞에서 사무엘은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하늘의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레는 블레셋 군사의 갑옷을 뚫었습니다. 그들은 가을바람에 낙엽지듯 이스라엘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사무엘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기도의 자리가 승리의 출발점이고 무릎을 꿇는 자리가 하늘의 문을 여는 자리입니다. 3000년 전에도 2000년 전에도 오늘날에도 영적 전쟁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비밀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우리가 두 손을 모을 때 하나님은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향해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은 일어나서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우리가 기도의 눈물을 흘릴 때 하나님은 하늘의 문을 여시고 은혜의 단비를 내리십니다.

기도를 통해 위기의 파도를 이겨내고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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