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응렬 목사(와싱톤중앙장로교회)

강단 개혁이 개혁과 부흥의 시작이다

종교개혁은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가? 종교개혁은 성경해석과 설교에서 시작되었다. 즉, 성경해석과 설교가 개혁의 시작이요, 강단 개혁이 개혁의 시작이다.

칼빈과 루터에게 어떻게 종교개혁을 일으켰는가 물으면, 아마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우리는 개혁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설교를 했다. 그리고 바르게 성경을 해석했다.” 그들은 성경번역을 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백성들의 손에 쥐어주었고, 하나님이 그 말씀을 통해 종교개혁운동을 직접 일으키셨다.

제2의 종교개혁의 필요한 이 시대에 무엇으로 종교개혁을 일으켜 낼 것인가? 해답은 ‘강단’에 있다. 즉, ‘말씀’을 통해서 개혁을 일으킬 수 있다. 설교를 잘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진정한 강단개혁이 되어야 진정한 영혼변화가 일어난다.

칼빈은 하나님 뜻을 이루시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설교’이며, 인간사회 개혁과 교회 삶에 가장 중요한 것 또한 ‘설교’라고 강조했다. 성경이 청중을 만나는 것은 주석이 아니라 바로 설교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1536년 파렐의 부탁으로 제네바 정착 때인 27세 때부터 목회를 시작했고, 2년 후 1538년 9월부터 스트라스부르에서 난민을 위한 목회를 3년간 했다. 그리고 1541년 10월 제네바로 돌아와 1564년까지 23년간 목회를 했다. 이후 스위스 제네바 생 삐에르 교회에서 목회하며 칼빈은 1년에 268번 설교를 하고, 186번의 신학 강의를 했다고 기록돼 있다.

칼빈의 성경관은 ‘성경은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말씀이자 오류 없는 진리’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저자의 의도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따라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료하게 성도들에게 풀어주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설교란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영광스러운 일이며, 하나님 말씀의 권위로서 설교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관점에서 칼빈은 말씀을 그대로 풀어내는 연속 설교인 ‘강해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더불어 목회자를 위한 주석과 평신도를 위한 설교를 구별했다. 둘 모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찾는 것에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주석은 목회자를 대상으로 하고 설교를 회중을 대상으로 했다는 차이가 있다. 오늘날 설교자 또한 이를 잘 구별해 설교에 반영해야 한다.

칼빈의 설교의 목적에 대해서도 분명히 했다. 칼빈은 말씀에 근거한 구체적인 삶의 적용을 통해 각 사람의 삶이 변화되는 ‘성화’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렇기에 설교자는 자신이 강단에서 선포하는 설교를 자신에게 가장 먼저 적용해 자신부터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이와 함께, 칼빈은 설교가 잘 전달되도록 설교하라고 권면했다. 주해와 설명, 적용과 권면의 일관된 설교 구성이 중요하다. 이와 함께, 원고에만 의존하지 않고 원고가 없이도 기억력에 의존해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제2의 종교개혁이 가능하다. 강단 개혁이야말로 개혁과 부흥의 시작이다. 설교자가 살아야 강단이 산다.

설교자는 태양이 아니라 달이다. 둘의 차이는 태양은 직접 빛을 반사하지만 달은 빛을 받아야 한다. 설교자는 태양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것이다. 설교자가 태양이 되어서 말씀을 자기마음대로 해석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끌어가고, 자신의 뜻에 따라 목회하고 설교하면 안 된다.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자를 통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리에 앉아 계신다 생각하며 설교해야 한다. 1000만인을 위한 설교가 아니라 주님이 듣고 고개를 끄덕이셔야 진짜 설교가 되는 것이다.

또한 성령께 의지해 인생의 마지막처럼 설교하라. 누군가에게는 오늘 듣는 설교가 생에 마지막으로 듣는 설교일 수도 있다. 설교자 또한 그 설교가 마지막일 수 있다. 그러면 한마디라도 함부로 하겠는가? 그러니 마지막처럼 강의와 설교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인생의 마지막처럼 설교한다면, 한 단어라도 한 문장이라도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성령을 구하며 설교를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종교개혁 신학자들의 설교였다. 강단에 서서 진리의 말씀으로 영혼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이 되기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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