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맞서 정통신학 지키며 새로운 보수교단 건설 힘쓰다

51인 신앙동지회

1943년 폐쇄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복원하는 재건작업이 해방 이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해방 이듬해에는 조선신학교를 총회직영신학교로 승인하여 운영했다. 그러나 김재준과 송창근 등이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총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완전히 파괴하고 훼손하는 가르침이었다.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했던 51인 신앙동지회.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했던 51인 신앙동지회.

당시 조선신학교 내 정통보수신학을 견지하던 학생들은 김재준 외 여러 교수들의 강의 내용에 문제를 제기했다. 1946년 11월 12일 밤 이치복 학우 집에서 일단의 학생들이 일생을 동지로 공생공사(共生共死)하자며 맹약했다. 이를 계기로 뭉친 51인의 신앙동지들이 1947년 4월 18일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진정서를 제33회 총회에 제출한다.

“지금 우리가 이 신학교에서 배우는 이런 것이 소위 신신학이란 것인지, 혹은 고등비평인지 또는 자유주의나 합리주의란 것인지 그 시비정체를 가릴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런 가르침 때문에 우리 신앙이 파괴당하는 이 어려운 문제를 이 신학교를 직영하시는 총회원 제위 앞에 호소하고 진정하오니 총회원 제위께서는 맑은 진리의 눈으로 해결하시고 판단하여 주심을 앙망하나이다.”

진정서 사건을 결코 작은 일로 보지 않고 정식 안건으로 채택한 총회는 8인 심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는 당시 총회장 이자익 목사를 선임했다. 위원회는 조사 결과 진정서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검을 들기 시작했다.

한편 51인 신앙동지회와 박형룡 박사는 조선신학교와 맞서기 위해 남산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여 개교하는 데 앞장섰다. 결국 조선신학교는 총회직영이 취소되었고, 남산 장로회신학교는 총회신학교로 계승되어 오늘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형룡 목사는 51인 신앙동지회에 대해 “정통신학 수호의 봉화를 용감히 들고 4~5년의 짧은 세월동안에 급속히 조명하여 이 강산에 영구히 꺼지지 않는 진리의 광명을 이루어놓았다”고 평한 바 있다.

박용규 교수도 <한국기독교회사>에서 “51명의 학생들이 진정한 조선신학교의 문제는 그들이 받고 있는 조선신학교의 교육에 관한 문제였지만, 그 핵심은 성경관에 관한 것이었다. 만약 이 변화의 시대에 ‘51인 진정서 사건’이 전형적으로 보여 주듯 바른 신앙을 계승하려는 일련의 노력이 병행되지 않았다면 한국교회는 더욱 더 혼란의 늪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과 반성경적인 교리와 신학에 반기를 들고 성경적 교리와 신학을 정립한 종교개혁자들과 칼빈의 후예들에게 교회를 파괴하는 분열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총회의 신학적 입장을 보수하고 계승하는 데 해방 이후 10년 동안 헌신했던 51인 신앙동지회를 향하여 반대편에서는 교권주의, 분열주의자라고 평가하더라도 우리는 정통신학을 보수하고 교단총회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앞장선 이들이라고 평가한다.
발제자/소재열 목사(한국교회법연구소장)

실업인 신앙동지회

실업인 신앙동지회는 교단 내의 공식적인 조직이나 단체는 아니다. 교단 내 신실한 실업인들의 자발적인 모임으로, 한국장로교회가 대분열한 이후에 보수주의 교단의 새로운 건설을 위해서 자신들에게 요구되는 시대적 요구와 사명에 부응하였다.

총회신학교 구 본관 건축을 위한 자발적 헌금에 나선 실업인 신앙동지회 부부 모임.
총회신학교 구 본관 건축을 위한 자발적 헌금에 나선 실업인 신앙동지회 부부 모임.

한국장로교회의 역사에서 에큐메니칼 파동으로 인해 1959년에 발생한 3차 분열은 말 그대로 대분열이었다. 전국적으로 노회와 교회가 분열되어 예배당을 놓고 법적인 소송까지 불사하는 상황에서, 이와 더불어 발생하는 재정적인 문제 또한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선교사들이 에큐메니칼을 지지하면서 연동 측으로 이탈했기 때문에 그들이 관여했던 학교 병원 기관 등이 모두 넘어간 상황에서, 승동 측이 겪는 재정적인 압박은 심각했다.

특히 교단의 심장부와 같은 신학교 문제가 최대 현안이었다. 당시 남산에 위치한 총회신학교를 철수해야 한다는 통보를 받은 상태였다. 에큐메니칼 쪽 학생들은 대광중학교로 이전하여 수업이 재개되었지만, 총회 쪽 학생들은 오갈 데가 없었다. 학교의 재정 상태는 말이 아니었고 주말이면 학생들이 각 지역교회들로 나가서 후원비를 구걸하는 처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46회 총회(1961)를 기점으로 교단 신학교의 시설 및 인가를 위한 각계의 노력이 전개되었다. 우선 총회는 전국교회에 ‘5000만환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모금이 될 것을 전제로 ‘신학교운영위원회’를 각 지역의 신실한 실업인 장로 26인을 중심으로 조직하였다. 회장에 곽현보 장로(장충교회), 부회장에 백남조 장로(부산 부전교회)가 선임되었다.

가장 먼저 응답한 분이 백남조 장로였다. 1962년 11월에 백남조 장로는 2000만 환으로 총회신학교 건축을 위한 사당동 부지 1만8000평을 매입하여 헌납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구 서성로교회의 우성기 장로가 건축을 위해 전국적으로 실업인들을 접촉한 것이 계기가 되어 소위 ‘실업인 신앙동지회’가 결성되었다. 아마도 백남조 장로의 헌신이 동지회의 결성에 큰 자극제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1963년 7월 9일, 부산 부전교회 백남조 장로의 댁에서 공식 결성된 신앙동지회는 가장 우선적인 사업으로 사당동 총회신학교의 구 본관 건축에 힘을 모았다. 1965년에 총회신학교 구 본관의 건축이 시작되면서 이들 신앙동지회 회원들의 자발적인 헌금이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교단분열 후 <기독공보>가 통합 측으로 가버려 총회 기관지가 없는 상황에서 현 <기독신문>의 전신을 창간하는 데 산파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러한 헌신은 상당 기간 이들이 교단의 정치나 기타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하는 계기가 됐다.
발제자/박창식 목사(총회훈장상훈위원장)

승동교회

미국북장로교선교회 소속 사무엘 포먼 무어(한국명 모삼열) 선교사의 선교 열정과, 당시 사회에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던 백정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복음 안에 하나 됨을 실현하며 1893년 세워진 교회가 승동교회의 전신 곤당골교회였다.

장로회 역사의 중요한 상징인 승동교회는 제101회 총회에서 역사사적지 1호로 지정 되었다.
장로회 역사의 중요한 상징인 승동교회는 제101회 총회에서 역사사적지 1호로 지정 되었다.

승동교회는 선교초기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역사적 영욕의 현장에 서있으면서, 단 한 번도 선교사를 통해 전수된 복음과 총회의 본류에서 이탈하는 일 없이 본 교단 역사의 산실로 역할을 감당해왔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승동교회는 그 어떤 교회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만세운동의 중심이 된 탑골공원 및 태화관 등과 인접해 있었기도 했지만, 교인들 중에 차상진 목사와 면려회장 김원벽을 비롯한 충군애국(忠君愛國) 인사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39년 3월 27일 조선예수교장로회 대표 13명이 서울에서 조선신학교 설립위원회를 조직하고 백방으로 독지가를 물색하던 중,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와 제휴되었다. 김 장로는 흔쾌히 학교를 위해 거액의 재산을 희사하기로 하고 상당한 부동산과 헌금을 내놓았다. 그리고 조선신학교는 1940년 4월 19일 승동교회 하층에서 개교하였다.

조선신학교와 깊이 관련된 자들은 1951년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로 분열될 때 모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를 떠났다. 그러나 승동교회는 떠나지 않았다. 조선신학교에 장소를 제공해 주기는 했어도 신학적 정통성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승동교회의 정체성이었다.

1942년을 마지막으로 일제에 의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폐쇄되고, 1943년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의 경기교구가 소집될 때 승동교회는 회집장소로 선정되는 비운을 맞는다. 하지만 일제가 만든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은 해방 후 해산하고, 대신 남부총회가 회집됐다. 1946년 6월 11일 개회한 제1회 남부총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2회 총회로 명명된다. 승동교회는 남부총회가 회집된 장소로서, 또 한 차례 역사적 현장의 중앙에 섰다.

1959년 제44회 총회는 WCC 문제로 분열되었다. 당시 WCC를 반대하며, 장로회 신학과 역사적인 정통성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에게 승동교회가 속회 총회 장소를 허락했다. 이듬해 9월 22일 제45회 총회가 고신 측과 합동총회로 회집될 때 장소도 승동교회였다. WCC를 지지하는 쪽은 연동 측으로, 반대하는 쪽은 승동 측으로 불릴 만큼 승동교회는 한국교회 본류를 이끌어가는 상징이자 희망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승동교회는 설립 100주년 기념의 해인 1993년에 신학적인 정통과 전통에 기초하여 역사를 보존하고, 이를 후대에게 계승하기 위하여 여러 자료들을 집대성했다. 2010년에는 역사관을 개관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어떻게 오늘에 이르게 됐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제101회 총회는 승동교회를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1호로 지정했다.
발제자/소재열 목사(한국교회법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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