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할 수 없다’ 고백하자 무대는 더 넓어졌다

유럽 무대 누비던 오페라 가수…갑작스런 갑상선 결절, 성악가 인생 ‘사형선고’
일본인 친구 권유로 성대 복원수술…쉽지 않던 재활·복귀 과정 영화화 개봉 앞둬
세밀한 손길로 좌절을 희망으로 바꾸는 하나님 찬양, “기꺼이 전도자 되겠다”


그는 더 이상 비운의 테너가 아니다. 비록 절정기의 50~60% 정도의 목소리 밖에 나오지 않지만, 아시아인 가운데 100년 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다는 과찬의 수식어에도 그는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소박할지 모르지만 그가 설 무대가 있고, 그의 노래를 듣기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고 고백했다.

엊그제도 새생명축제가 열리는 교회에서 찬양으로 섬기고 왔다며,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수 년 전만 해도 오페라의 본고장 유럽을 두루 섭렵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여기저기 불러주는 곳을 찾아가며 노래하는 ‘유랑의 전도자’가 되었다.
 

▲ 영화 <더 테너:리리코 스핀토>의 주인공, 테너 배재철. 그는 예전처럼 목소리가 회복되지 않아 노래하기가 힘들지만, 무대로 복귀하려는 소망을 놓지 않고 있다. 그의 삶은 이제 시작이다.

테너 배재철(46).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잘 나가던 오페라 가수가 갑상선 암으로 성대 결절을 겪고 다시 무대에 서는 스토리가 극적이기 때문에 그를 더욱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테너 배재철의 이야기 <더 테너:리리코 스핀토>가 곧 영화화 되어 개봉된다.

이미 지난 10월 11일 일본에서 먼저 개봉하여 열도를 눈물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영화배우 유지태가 테너 배재철을 연기하기 위해 1년간 혹독한 성악 연습을 했다는 뒷 얘기부터 수술이 끝난 뒤 창조주를 찬양하는 영상까지 모든 것이 호평 일색이다. 국내에서도 영화 배급사가 연말에 맞춰 개봉시기를 저울질 하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가 놀이터였다. 서울 흑석동 한가람교회에 출석하면서 성경을 배우고, 어린이 찬양대에서 노래에 눈을 떴다. 교회가 그의 뼈대를 세워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래를 꽤 잘한다는 재능을 발견한 것도 교회였다.

당시 초등학생에게 인기있던 KBS-TV ‘누가 누가 잘하나’에 출연하여 그는 단박에 지역 주민의 스타가 되었다. 사람들이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할 때마다 좀 쑥스럽고 어색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래서 ‘무대체질’이 뭔가를 얼핏 알았다. 관객들이 쏟아내는 갈채와 환호를 맛보았다.

달콤하고 향긋한 사탕 같았다. 그 때부터 그는 무대에 대한 경외심이 생겼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진로를 결정할 때도 망설임 없이 노래를 하자고 생각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음악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간다. 그러나 그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노력하면 환경도 극복할 수 있다는 나름대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건이 되지 않아 제대로 레슨을 받지 못했지만, 열심히 하면 길이 열린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남들이 레슨을 받으러 갈수록 더욱 더 노래 연습을 했습니다.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한양대 음악대에는 그가 동경하던 테너 신영조 바리톤 오현명 교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변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지체없이 한양대에 입학했다. 휴학을 하고 4학년에 복학을 할 때는 ‘큰 산’이라 여겼던 바리톤 고성현 교수가 부임해 있었다. 그는 한양대에서 성악의 기본뿐 만 아니라 솔직히 은혜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동아콩쿨 우승을 하고, 그는 본격적으로 성악을 공부하기 위해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베르디국립음악원에 곧장 입학 했다. 이탈리아 생활도 만만치가 않았다. 1997년 부모님의 사업이 부도가 나 유학비와 체제비가 어려웠다. 처음으로 관광 가이드를 했다. 그러나 그도 쉽지 않았다. 여행사 또한 부도를 맞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국제 콩쿨에 나가 입상을 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집세를 내고 생활비를 쓰려면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너무나 절박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하나님은 아셨는지 산레모 콩쿨 1등을 시작으로 베르체르 콩쿨, 도밍고 콩쿨 등의 입상을 허락했다. 그런데도 생활비를 버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밀라노 생활을 접고 아스티주 까넬리의 시골로 이사를 가던 날이었다.

“당시 이삿짐을 꾸리고 전화기의 코드를 뽑고 나가려는 순간 플라시도 도밍고 콩쿨 관계자한테 전화가 온 겁니다. 오디오 심사를 통과했으니 함부르크로 오라는 전갈이었습니다.”

비록 시골로 이사를 가지만,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렇게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일용할 양식’을 콩쿨을 통해 보내 주셨다. 도밍고 콩쿨을 시작으로 오페라 가수로서 삶도 열렸다. 그는 헝가리 미슈콜츠 시립극장에서 <토스카>로 데뷔 했다.

그걸 마중물로 하여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동유럽 북유럽 가리지 않고 오페라 인생이 펼쳐졌다. 그가 꿈꾸던 유럽 무대의 향연이 시작됐다. 거칠 것이 없었다. 2003년에는 독일 자부르퀸 주립극장 전속가수가 되어 이탈리아의 생활을 마감하고 독일로 터전도 옮겼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오페라 시즌인 9월이 되었다.

베르디의 <돈까를로> 공연 중 갑자기 쉰소리가 나고 목도 아팠다. 극장 전용병원을 찾아가자 갑상선 결절이라며 수술을 권했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비인후과 최고 권위자가 있는 마인츠 국립대학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이미 암세포가 림프관에 전이되어 쉽지가 않은 수술이었다고 합니다. 8시간 반에 걸친 대수술을 했는데 결국 오른쪽 신경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성악가로서 인생이 끝난 것입니다.”

절망 뿐이었다. 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평생 노래만 불렀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니 기가 막혔다. 그런 가운데 그의 몸 상태를 체크도 하고, 위로도 할 겸 일본인 친구 와지마가 독일에 찾아왔다. 오히려 친구가 목소리를 잃은 것을 보고 더 괴로워하고 아파했다.

일본에 돌아간 와지마가 성대 복원수술을 권유했다. 수술을 집도했던 이시키 노부히코 교수는 이미 당시 77세로 대학병원에서 은퇴하여 개인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를 수술하겠다며 나섰다. 일본 교토에서 부분마취를 하며 재수술을 했다. 노부히코 교수는 피아노 조율을 하듯 천천히 그의 목을 만지고 복원해 나갔다.

“제 목소리가 들리나요. 노래를 해 보세요?”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그의 수술 장면을 일본 NHK 방송이 그대로 내보냈다. 이후 한국 KBS 스페셜에서도 그의 노래인생을 생생하게 다큐멘터리로 촬영하여 방송했다. 그리고 영화까지 제작되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 <더 테너:리리코 스핀토>는 한 성악가가 목소리를 잃고 ‘사형선고’ 상황에서 무대에 다시 서는 장면을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배재철은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인 현재 진행형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을 모르던 와지마가 세례도 받고 구원을 얻은 점이 너무나 귀합니다. 좌절은 사람을 아주 피폐하게 만듭니다. 저를 도구로 사용하여 친구도 믿게 하는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통해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삶은 기적이다. 그는 좌절할 틈도 없다면서 예전처럼 화려하거나 커다란 무대가 아니더라도 노래할 공간만 있다면 어디든지 가겠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관객만 있다면 찾아가겠다고 밝혔다.

예전처럼 100% 목소리가 회복되지 않아 음역도 낮춰 노래하지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솔직한 고백이다. 그만큼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갈급해 있다.
영화 <더 테너>에서 배재철 역할을 맡은 유지태는 이렇게 절규한다.
“I can`t give up”
“나 포기할 수 없어. 무대로 돌아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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