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와 어깨 나누며 사랑으로 함께 가는게 복지”

첫 인상이 참 온화했다. 거짓말은 커녕 평생 누구한테 손가락질 한번 당하지 않고 살았을 것 같은 인자한 표정이었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데도 불구하고 우산을 두 개씩이나 들고 마중 나왔을 때부터 알아봤다. 삼강원 이사장 강창무 장로(신현교회 원로). 그는 아버님께서 일궈놓으신 전라남도 곡성 고향 언저리에서, 정신지체 장애인들과 함께 똬리를 틀고 살고 있다.

“지난 해 대학 동창들이 다녀갔는데 기쁘더라구요. 비록 한 때지만, 이곳에서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중에 후원까지 하는 것을 보고 참 흐뭇했습니다. 보람도 느꼈구요.”

강 장로는 원래 고아들로 가득찼던 이곳 삼강원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고아들과 같이 한 방에서 기거하고 통밀과 수수의 구호양식을 먹으며 ‘냄새나는 생활’을 하던 이곳이 그다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버님이 세 번씩이나 불러 이곳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을 땐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우리 가족도 먹을 것이 없는데 자고 일어나면 식구가 한 명씩 느는 거예요. 고아들이 100명 넘게 생활하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아찔하죠. 결국 잘 곳도 마땅치 않아 당시 군청에서 관리하던 집에서 무리지어 살거나 심지어 서원 마당에서 자기도 했습니다.”

그는 60년도 훨씬 지난 옛 이야기를 꺼내며 누에를 치던 잠실이 현재 삼강원의 터전이 되었다면서 아버님이 왜 고아들을 사랑했는지 이제야 이해할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우리가 아프리카의 난민을 생각하는 것처럼 당시 이곳 삼강원도 이방인의 눈으로 볼 때에 난민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에디오피아나 필리핀 등지에서 구호물자를 보내줬겠냐고 그는 반문할 정도였다.

“매일 월드비전(선명회)에서 1인당 3달러씩 보조금을 주었습니다. 국가에서 할 수도 없는 일을 종교단체에서 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삼강원은 1951년 설립하여 1957년 재단법인 설립 허가를 받고, 1971년 복지법인으로 등기를 마쳤습니다.”

하지만 고아원 중심의 삼강원은 1984년 육아시설에서 정신지체 장애인 생활시설로 목적을 변경했다. 이후 특수학급도 운영하며 현재 장애인 115명과 직원 55명이 동고동락하며 살고 있다.

강창무 장로는 청년과 장년시절을 서울 신현교회에서 보냈다. 고등부 시절 반사를 맡아 혼자서 400명의 학생들을 가르친 적도 있다. 아마도 그때의 경험이 지금 그가 삼강원을 운영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지금도 별 차이는 없지만 당시 신현교회에 출석하는 학생들은 가난한 달동네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환등기를 이용하여 영화같지 않은 영화도 보여주고, 그럴싸한 명분을 붙여 공부도 가르쳤다. 지금으로 말하면 시청각 교육인 셈이었다.

“1960년대 대학생회를 처음으로 조직했습니다. 지금도 내노라하는 신현교회 출신들이 참 많습니다. 어릴 때 고아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제 뼈대를 만들어 놓았다면, 대학교 때 신앙생활은 뼈대 위에 살을 붙여 놓은 것 같습니다. 그만큼 교회는 저를 가꾼 터전이었습니다.”

강 장로는 하나님이 천한 그릇을 사용하시는데도 다 뜻이 있었다면서 고등학교 때부터 새벽기도회를 다니기 시작하여 지금도 새벽제단으로 하루를 여는 것을 보면 참 멋진 인생을 사는 것에 감사가 절로 나온다고 말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새벽기도는 힘들고 어렵고 고된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주님께 울부짖으며 애원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등 따뜻하고 배부른 사람은 잘 모릅니다. 세상에서 낮은 자, 약자들이 그래도 감사하며 바르게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는 현장이 새벽기도회입니다.”

강 장로는 남루한 할머니들의 손을 부여잡고 함께 기도하면서 서로 마음을 터놓고 위로하던 새벽을 잊을 수가 없다며, 이곳에서도 5시에 일어나면 꼭 묵상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설명했다.

“교회는 영향력이 있거나 소위 말발이 있다는 사람이 이끌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새벽마다 기도하는 보이지 않는 헌신된 일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 장로가 아버님의 부르심을 받고 곡성 삼강원에 정착할 때까지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30년 전 강인형 장로는 아들을 불러 장애인 시설인 이곳을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당시 복지시설은 가족들이 운영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때 강 장로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저는 아버님처럼 시설을 잘 운영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구제는 자기 돈으로 해야지 남에게 손을 벌려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맡을 수가 없습니다.”

젊은 패기였을까? 강 장로는 사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벌면 그때 복지사업을 본격적으로 하리라 다짐했다. 이후 5년이 흘러 아버님은 또 강 장로를 불렀다. 삼강원을 동생이 맡아 운영을 했는데 동생이 갑자기 암으로 소천하여 후임자가 마땅치 않았다. 아버님은 조용히 말씀하셨다. 강 장로가 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제수씨께 맡기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아버님이 일궈놓으신 사업입니다. 좋으신 대로 하십시오.”
이후 강 장로는 자기 돈으로 구제를 하겠다는 어줍지 않은 신념을 버리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돈으로 고아나 장애인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곡성 인구가 3만 명입니다. 그 중에 장애인은 3100여 명입니다. 그런데 곡성에 유일한 장애인 시설인 이곳에 고작 115명이 생활합니다. 더 많은 장애인들이 혜택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강 장로는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은 주거는 물론 의식주도 매우 좋다며, 비장애인과 같이 장애인들도 더불어 생활하는 환경에서 지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더 많은 장애인들이 정부나 엔지오의 도움을 받아 제대로 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 장애인 115명이 생활하고 있는 삼강원. 이곳을 <둥지>로 여기고 그들은 늘 감사하며 산다.

남은 여생을 장애인과 함께하겠다는 강 장로는 최근들어 소박한 바람이 생겼다. 치매 노인들을 위한 복지시설을 운영하고 싶은 것이다.

“삼강원은 정신지체 중증장애인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와 함께 치매 노인을 위한 복지사업도 겸해서 하고 싶습니다. 가족이라도 치매 노인은 꺼리잖아요.”

어찌보면 강창무 장로의 또다른 인생은 이제 시작이다. 아버님이 운영하시던 고아원이 정신지체 장애인시설로 바뀌고, 이제 하나 더 추가되어 노인복지시설로 변환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차를 타고 상경하는데 “선생님 감사합니다. 언제 또 와요?” 하며 고개를 흔들며 어눌한 말솜씨로 안아달라고 종용하던 정신지체 아이들이 계속 떠올랐다. 강창무 장로의 인자한 얼굴도 계속 오버랩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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