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절대자 향한 신앙고백·애국심 고취 돋보였으나 예술로서 발레 찾기 어려워


쉽지 않은 걸음이었다. <조승미 발레단>이후 신앙 발레는 명맥이 끊어졌다고 생각하여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느낌은 괜찮았다. 열정 하나로 생명미를 표출하려는 의지 또한 강하게 느낄 수가 있어 의미가 더했다.

6월 29일 서울 이화여대 삼성홀에서 열린 <2012 신은경 이화발레 앙상블>은 ‘시편 교향곡’과 ‘유관순’의 창작 두 편을 무대에 올렸다. 각기 다른 내용이지만 두 작품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유사한 점이 상당히 발견된다. ‘시편 교향곡’은 러시아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탄생 130년을 맞아 신은경 교수가 야심차게 준비한 창작 발레이다. 유관순은 작곡가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하여 빼앗긴 나라를 찾으려는 한 소녀의 절규를 그리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절대자에게 의지하여 소망을 추구하는 점이 같다. 무대연출과 조명도 비슷하고 심지어 음향효과도 유사하여 설명만 없다면 한 작품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시편 교향곡’은 세찬 빗소리와 천둥소리로 서막을 연다. 마치 천지가 개벽하는 듯 어두움이 계속되고, 조명 또한 1인 독무에 맞춰 절망에 처해 있는 자신을 구해달라는 부르짖음으로 연결된다. 독무는 4인무에서 8인무로 전환되고 군무도 기도에서 열망으로 바뀐다. 이어 하늘의 음성이 들리면서 빛이 보이고, 불안하고 당황했던 내 모습이 점차 회복되는 모습으로 형상화 된다. 다시 말해 절망-열망-찬양으로 이어지는 인간의 갈구를 절제 있게 창조주께 다가가는 작품으로 표현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시편 교향곡>은 곡이 정확하고 엄밀하며 대위법과 화성법을 존중한 종교음악이다. <봄의 제전>에서 나타난 파격적이고 불협화음의 충격은 찾아볼 수가 없다. 목관악기에서 금관악기로 전환되는 멜로디도 신선하게 들린다.

신은경의 이화발레 앙상블도 작곡가의 의도대로 점층법 군무를 사용하며 어두운 암갈색 톤에서 환희의 노란 빛으로 피날레를 장식한다. 이는 자연스런 절제된 발레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정적으로 동선이 움직이다 보니 집단무에서 볼 수 있는 역동적이며 활발한 춤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대칭의 묘를 살리려고 4인무를 추는 것은 좋았는데 이왕이면 빠드 까뜨르(각각 한 사람, 셋, 넷이서 추는 춤)를 하면서 관객들에게 푸에떼(한 다리로 서서 회전시키는 동작)를 선보였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유관순’은 역사적인 사실을 스토리텔링으로 전개하여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몄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본다는 느낌이 강했다.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은 관혁악법과 화성이 자유롭고 다양한 조의 변화가 특징이다. ‘유관순’은 여기에 맞게 배달 민족의 역사, 이화동산의 학동의 분위기, 일제의 수난과 외침, 못다 핀 유관순의 순교로 이어지는 ‘위인극’이다.

빨래터에서 재잘거리는 소녀들의 정겨움은 극의 결론을 암시하는 주춧돌이다. 이어 ‘시편 교향곡’과 마찬가지로 4인무가 펼쳐지고 반복되는 집단무가 전개된다. 깔끔하게 처리되는 춤의 향연은 유관순이 끌려가고 고초를 당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위인전 하면 떠오르는 피, 고문, 태극기 등의 도식화된 이미지가 ‘유관순’에도 벗어나지 못했다. 애국심에 호소하려는 춤이었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고 만세를 부르는 장면도 예측이 가능해 발레로서의 특징을 살리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관순’은 발레의 소품이다. 대작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무대는 물론 음향, 안무도 색깔을 달리하여 음울함에서 벗어나 밝은 색조로 빠르게 전환하는 기획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시편 교향곡’과 ‘유관순’을 보고 신앙의 깊이나 애국심의 고취는 고양시켰는지 몰라도 발레의 예술성은 그다지 찾기가 어려웠다. 비단 창작발레의 ‘소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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