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태 목사(전주제자교회)

하나님을 가볍게 여긴 채 세상에 물들어 살지 맙시다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에 9:1~2)

박용태 목사(전주제자교회)
박용태 목사(전주제자교회)

우리나라 재벌, 언론, 정치, 사법부 등 이른바 권력의 핵심 세력들이 아주 복잡한 혼맥을 이루고 있다는 보고서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행세깨나 한다는 가문들은 대부분 친일파 세력으로부터 자라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일본 덕분에 우리나라가 근대화됐다고 말하면서 일제강점기를 공공연하게 미화하는 사람들을 보면 확실히 친일파의 영향이 여태까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약한 사람들이 자기 세력을 증폭시키는 수단으로 ‘결혼’을 사용한 것도 분명한 것 같습니다.

죄짓는 데 앞장서는 지도자

에스라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페르시아·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에 8:31) 그런데 오자말자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이방인과 통혼하는 문제였습니다. 에스라보다 수십 년 앞서 돌아온 사람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하면서 언약공동체의 정체성을 허물어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방인과 통혼하지 말고, 이방 문화를 따라가지 말라는 것은 율법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그 명령을 무시한 채 이방인과 통혼하는 일에 제사장, 레위인 할 것 없이, 심지어 그런 일을 가로막고 질서를 유지해야 할 방백과 고관들이 앞장을 섰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가르치고 모범을 보여야 할 영적 지도자들이 병들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해야 할 관리들이 앞장서서 범죄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 5:30~31) 탄식한 바 있습니다. 교회가 병이 들고,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데, 영적인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고약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문제의식

이방인들과 통혼했던 그들도, 한때 거룩한 사명감으로 불타올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바벨론·페르시아를 떠나온 것 자체가 엄청난 헌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와서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기본적인 안전을 위협하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더니 갈등과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안전을 확보하고 세력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결혼이었습니다. 이방인과 통혼하는 사람들은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주장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교회가 깊이 병들게 됐습니다.

더 심각한 일은 교회가 병이 들고 있는데,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스라를 찾아와서 이방인과 통혼하는 문제를 고발했던 방백들은 이방인들과 통혼하려는 사람들을 가로막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그것이 언약공동체 안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는 문제의식은 갖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병들어가고,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아설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옳고 그른 일인지, 무엇을 용납할 수 있고 또 무엇을 용납할 수 없는지에 대한 감각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인종차별을 조장하고 노예제도를 지지하며 폭력적인 제국주의 확장과정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하는 등 교회가 저지른 죄악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그런 죄악에 반대하는 분들이 나타났습니다. 한쪽에서는 신앙을 이용해서 죄악을 정당화했고 다른 쪽에서는 성경을 읽으면서 그 죄악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이용해서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자신을 드리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 시대 ‘극우기독교’가 있습니다. 모든 극우집단은 자기 계급, 자기 집단의 이익을 맹목적으로 추구합니다. 극우세력은 일반적으로 공공선이나, 도덕적 대의에 관심이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기독교는 결코 극우적인 방향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자기 이익을 위해 신앙을 이용하거나, 세상과 야합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에스라 시대에는 이방인과 통혼하는 문제 때문에 세상과 구별되는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극우기독교 때문에 교회가 병들고 있습니다.

선한 일에 협력해야

이방인과 통혼하면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에스라는 그저 굴러온 돌이었습니다. 이미 이방인과 통혼한 권력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낙담하고 있는 에스라를 스가냐가 격려합니다.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에 10:4) 스가냐의 격려를 힘입어, 또 도와주려는 사람들과 더불어 실태 조사를 시행합니다.

물론 모두가 다 지지하거나 협력하지는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에 10:15) ‘천사의 목회를 하더라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고, 악마의 목회를 하더라도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지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정말 올바른 일인가?’하는 질문입니다. 올바른 일이요, 정말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일이라면 반대가 있을지라도 추진해야 합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설령 거대한 세력이라 할지라도 악한 일을 하고 있다면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 앞장서서 헌신해야 합니다. 앞장서서 헌신하지 못할 것 같으면 최소한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을 격려할 줄은 알아야 합니다. 모든 헌신자에게는 스가냐 같은 위로자, 격려자, 지지자가 필요합니다.

어떤 명단에 속할 것인가?

실태 조사를 마친 후, 이방인과 통혼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공개했습니다.(에 10:18~43) 이 문제를 타협 없이 확실하게 처리하려고 이름을 공개한 것입니다. 에스라서에 두 종류 명단이 나옵니다. 에스라 2장에 보면 스룹바벨과 함께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1차 귀환, 주로 가문별)이 있고 8장에 에스라와 함께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2차 귀환) 10장에는 범죄자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에도 이름이 있습니다. 거룩한 믿음과 헌신으로 영광을 얻을 이름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 물들어 하나님을 떠나버린 사람들의 이름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긴 채 세상에 물들어 산다면, 우리 이름도 패배자처럼 기록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치스러운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맙시다. 하나님이 우리 이름을 기억하시는 분인데, 영광스러운 헌신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시대,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는 데 성공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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