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석 목사(예현교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 5:15)

강대석 목사(예현교회)
강대석 목사(예현교회)

본문의 불분명성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낳는다. “왜 하나님은 여기서 여호수아를 또 만날까?” 여호수아는 이미 1장에서 하나님의 지도자로 임명장을 받은 상태이다. 홍해를 가른 모세처럼 요단강을 멈추게 하고 백성에게 성결을 지시하며 제사장에게 명령을 내린다. 게다가 모세가 죽은 후 30일을 애곡하던 절망 상태의 백성들을 이곳까지 잘 이끌어 냈으니 차세대 지도자로 입지를 굳히며 그 능력을 입증한 셈이다. 그럼에도 또 여기서 재차 임명장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

최후의 진을 쳤던 모압의 성읍 싯딤에서 요단을 건너 도착한 최초의 숙영지 여리고 평야의 길갈. 하나님은 이곳에서 할례를 통해 애굽의 수치를 씻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열두 돌을 세우게 하신다. 너무나도 긴 훈련 과정인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치는 순간, 얼마나 큰 감동이 몰려왔을까! 그동안 너무 지쳐 모두 내려놓고 드디어 도착한 약속의 땅에서 기쁨과 쉼을 누리고 싶은 생각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쉼을 허락지 않으시고 지도자를 다시 부르신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특정 장소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 거룩한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평과 저주로 가득 찼던 광야 또한 거룩한 곳이었다. 이제 그들이 나아가는 여리고는 광야와 다른 곳이 아니라 광야의 연속선상일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싯딤과 길갈을 구분하고 길갈에서의 안정된 삶을 기대하고 싶겠지만,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는 한 싯딤과 다를 바 없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다시 부른 이유도 길갈 또한 만만치 않은 여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는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어야만 했다. 그러기에 할례는 싯딤(광야)과 길갈(가나안)을 구분 짓는 잣대가 아닌 더욱 힘을 얻어야 하는 추력의 기준점이다. 가나안은 우리가 상상하는 쉼과 기쁨이 있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더욱더 하나님과 밀착돼 동행해야 하는 투쟁의 장소였다.

우리는 항상 자기만의 길갈을 꿈꾼다.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유토피아적 상상에 매몰되어 작은 성취에 안주하는 습관이 그것이다. 예수님은 변화 산상에서 황홀경에 빠져 그곳에 초막 셋을 지어 영원토록 머물자는 베드로를 꾸짖어 사망과 고통, 시기와 분쟁, 순교까지 감당해야 하는 현실로 그를 데리고 오셨다. 거칠고 아픈 현실일지라도 이곳을 길갈로 만들어야 하는 책임이 그리스도인의 존재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축복은 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동행이며 우리에게 은혜는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광야로 달려 나갈 넘치는 용기, 그 자체이다. 때로 오늘의 현실이 절망적인 싯딤일지라도 하나님을 찾는 목마름의 예배가 우리 안에 멈추지 않는 한 이곳은 곧 길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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