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사물의 모양과 상태가 바뀌어 달라지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의 변화, 교회의 변화, 총회의 변화를 끊임없이 말한다. 그러나 ‘누가, 무엇을, 어떻게 바꾸는가’에 대한 질문 없이, 변화라는 말만 구호처럼 남용될 때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 한국교회와 사회는 변화를 끊임없이 외친다. 새로운 정책을 세우고, 구조를 개편하고, 다양한 프로그램과 캠페인, 표어를 쏟아낸다. 제도와 환경을 정비하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람이 저절로 변하지는 않는다. 상황이 달라지면 일시적으로 행동이 조정될 수는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쉽다. 결국 변화의 핵심은 구조나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 곧 인격의 변화에 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12:2)라고 말한다. 여기서 ‘변화를 받아’라는 표현은 수동태이다. 진정한 변화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변화는 인간이 계획하고 밀어붙이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주권적 역사 안에서 ‘받게 되는 사건’이다.
문제는 우리의 인격이 죄로 깊이 오염되어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가치와 가정환경, 오랜 습관이 어릴 때부터 몸과 마음에 배어 우리의 인격을 형성한다. 여기에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전적 부패가 더해진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우리의 지성과 감정, 의지와 욕망까지 죄의 영향을 받지 않은 영역이 없다. 이런 인간이 ‘내가 나를 바꾸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성경은 누구를 바꾸라고 말하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너희가 변화를 받으라”고 나 자신을 향해 말씀하신다. 사람이 할 수 없는 변화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이유는, 그 변화를 실제로 이루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로마서 12장 1절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한다. 하나님은 모든 자비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그 은혜에 응답하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린다. 여기서 ‘산 제물’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는 제사가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지속적인 헌신을 뜻한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새로워진 마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게 하신다. 변화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맡길 때 맺히는 은혜의 열매이다.
이 원리는 가정과 교회, 사회 모든 영역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누구나 남편이, 아내가, 자녀가 변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포장이 벗겨지고 시간이 흐르면, 각자의 본성이 드러나면서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가 시작된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기준에 맞추려 하고, 아내는 남편을 자기화하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바꾸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먼저 변화되고, 변화된 마음으로 배우자를 대하라고 요구한다. 내가 변할 때 가정이 변하기 시작한다. 남을 내 편하게 하려고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되어 이웃과 가족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내 유익을 위해 이웃을 조정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변화된 인격으로 이웃을 돌보고 세우라는 부르심이다.
제110회기 총회가 ‘정책총회’를 지향하며 출발한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미래를 준비하는 정책을 세우고, 당면 과제를 지혜롭게 해결해 가는 일은 총회의 책임이다. 각 부서의 역할을 정비하고, 회무 절차를 개선하며, 다음 세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고민하는 일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총회가 새로워지지는 않는다. 총회의 미래를 밝히는 힘은 문구와 구조가 아니라 결국 사람에게 있다.
정책총회가 이름이 아닌 내용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몇 회기 집중한다고 해서 완성되는 일이 아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세대의 계승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성령 안에서 변화된 총대들이 누적되어야 한다. 말씀과 기도로 마음이 새롭게 된 총대들이 하나님의 뜻을 함께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며 헌신할 때, 비로소 정책도 복음적 방향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각 노회가 연령을 안배하여 60대·50대·40대가 함께 총회를 섬기도록 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것도 한 예가 될 수 있다. 젊은 총대들이 선배들의 섬김을 가까이에서 보고 배우며 총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과정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어떤 제도도 성령 앞에 겸손한 사람들을 대신할 수는 없다.
결국 오늘 우리가 붙들어야 할 변화는 또 다른 슬로건이 아니다. “총회를 변화시켜 주옵소서”라는 기도보다 “먼저 저를 변화시켜 주옵소서”라는 고백이 많아질 때, 정책총회는 이름이 아니라 실체가 될 것이다. 다시 말씀으로, 다시 기도의 무릎으로, 다시 성령의 통치 아래로 돌아갈 때, 우리 교단과 총회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진정한 변화는 성령의 역사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은혜 앞에 자신을 내어 드리는 한 사람으로부터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흘러가게 될 것이다. 그 한 사람이 모이고 쌓일 때, 총회와 교단의 방향도 새로워질 것으로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