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태 목사(전주제자교회)

세상의 화려함보다 하나님의 뜻 이룸을 더 귀히 여깁시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에 7:10)

박용태 목사(전주제자교회)
박용태 목사(전주제자교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애굽과 형제들을 칠 년 기근에서 건져낸 요셉, 출애굽을 이끌었던 모세나 여호수아, 북이스라엘의 영적 암흑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던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을 생각해 보세요. 대부분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면서 왕 되신 하나님을 무시했던 사사시대, 베들레헴의 보아스는 하나님께 굴복하며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애를 증명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심으신 곳에서 쓰임 받는 일꾼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가문

에스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페르시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2차 귀환 과정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입니다. 에스라는 성경에서 ‘나’ 혹은 ‘우리’라는 일인칭 표현으로 등장할 만큼 중요한 인물입니다. 에스라 7장은 다섯 절에 걸쳐서 에스라의 조상을 열여섯 명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의 조상 이름을 열여섯 명이나 길게 언급하는 이유는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풍습대로 에스라가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요, 충분히 믿을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인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을 모태신앙이라고 합니다. 모태신앙으로 자란 것이 큰 복인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대를 잘 이어가면서 믿음의 조상, 가문의 이름을 명예롭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끔 모태신앙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신앙’이라고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정말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당대 신앙이라고 해서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고 구원받았으니, 후손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면 됩니다. 우리가 모두 믿음의 명문가를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에스라는 페르시아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였다고 합니다.(스 7:6) 페르시아 같은 강대국에서, 사로잡혀온 히브리 민족의 후손으로 태어나 자라면서 왕의 신뢰를 얻을 때까지 얼마나 치열한 인생을 살았을까요? 그런데 에스라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에스라가 페르시아 왕의 치하에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언급하면서, 동시에 두 번이나 에스라가 바벨론을 떠났다고 언급합니다.(에 7:6, 9) 바벨론은 이미 망하고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왜 바벨론을 떠났다고 말할까요? 에스라를 마치 애굽을 떠난 모세처럼 소개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 공주의 아들이라는 지위, 애굽에서 누릴 수 있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삶을 ‘죄악의 낙’이라고 여기면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히 11:24~26) 히브리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결국 심판받은 애굽을 떠난 모세의 선택을 모세의 믿음이라고 칭찬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수모를 받은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에스라가 바벨론을 떠났다고 하는 것은 에스라를 마치 새로운 모세처럼, 심판받은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간 믿음의 사람으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모세처럼, 에스라처럼 세상의 화려함과 풍요로움보다 하나님의 뜻 이루는 일을 더 귀하게 여기는 성도 되시기를 바랍니다.

왕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던 에스라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하는데, 만약 여러분이 에스라의 부모였다면 에스라의 선택과 행동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여러분의 자녀들이 세상을 버리고 복음의 증인이 되어 십자가를 짊어지는 희생과 수모를 감수하는 삶을 살겠노라고 말한다면, 고생한다고 해서 반대할 것이 아니라 칭찬하고 격려하는 부모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세상에서 화려한 이름을 얻기보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십자가 짊어지는 삶을 살게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인생일까요? 그처럼 쓰임 받는 일꾼 되게 해 달라고 소원을 품고 기도하는 부모가 되시길 바랍니다.

율법에 익숙한 사람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에 익숙했다고 합니다.(에 7:6) 에스라는 이방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문화 속에서 페르시아의 말을 하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에스라는 페르시아의 언어와 문화에도 익숙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왕의 신뢰를 받는 자리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페르시아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에스라가 당시 세상에서 비주류요 특이한 소수문화였을 언약 백성의 율법과 전통을 잘 배우고 익혔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익숙해지는 것이 저절로 되는 일입니까? 율법에 익숙하기까지 열심히 배우고 공부했을 것입니다. 가끔 성경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주 읽고 묵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익숙하다는 것은 자주 접촉했다는 것입니다. 자주 접촉하면 익숙해집니다. 말씀을 자주 접촉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물론 성경은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익숙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를 담고 있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자신이 배우고 아는 말씀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따라 페르시아의 화려한 생활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를 택한 것만 봐도 그가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결심과 소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에스라가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가르치기로 한 것입니다.(에 7:10) 이것은 에스라가 마음에 품고 있었던 꿈이요 비전이요 소망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언약 백성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 말씀이 꼭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요즘 교회가 병들었다고 말합니다. 과거 예루살렘 성전에서 우상을 숭배했던 사람들처럼, 예배당을 출입하지만 실상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도사리고 있습니다.(렘 7:8-11 참조)

이런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빚어내는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해 주는 것이 성경입니다.(딤후 3:17) 교회 안에 말씀의 부흥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연구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질문 없는 신앙, 생각하지 않는 신앙, 맹신을 강요하지 마세요. 무조건 믿는 신앙은 어느 순간 무조건 무너질 것입니다.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연구와 순종은 부담스러운 일이요 신앙에는 감동과 체험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혼란한 시대, 교회가 살아나려면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무엇이 참된 의로움인지 가르쳐 주는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딤후 3:16) 성령 충만해서 공부하고, 성령 충만해서 의심하고 질문하며, 성령 충만해서 고민하고 아파하며, 성령 충만해서 슬퍼하며, 성령 충만해서 불의와 거짓을 대항하며, 성령 충만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로를 가르치고, 성령 충만해서 서로 믿음을 격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에스라와 같은 꿈과 소원을 품고 일하는 일꾼들이 더 많아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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