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석 목사(예현교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요 14:1~4)

 

강대석 목사(예현교회)
강대석 목사(예현교회)

근심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제자들이 근심 중에 있기 때문이다. 근심의 이유는 자꾸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신다는 것이다. 앞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하신 자신이 팔릴 것에 대한 말씀에 분명 제자들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곧 의지할 주체가 없어짐과 동시에, 그 빈 자리를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다는 두려움을 의미한다. 또한 안정적이고 항구적인 사역의 기반을 마련하고 싶었던 그들의 바람이 무너지는 것을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보편적 행동은 대신 의지할 대상을 찾는 것이다.

제자들은 물리적 증거(physical evidence)를 찾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나의 길을 너희가 알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도마는 본 적이 없는 그 길을 모른다고 답한다. 다시금 제자들에게 나의 길은 아버지께 가는 길이며 너희도 그 아버지를 알고 있으니 그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안심시키지만 빌립은 그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조른다.(5~8) 제자들은 불안감의 상쇄를 위해 가시적인 증거를 예수님께 요구한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내적 증거(internal evidence) 앞에 놓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너희가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보았다고 질책하신다. 바울은 너희 안에 함께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를 확증하라 가르친다.(고후13:5) 증거는 이미 내 안에 충분히 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책임은 이제 내 안에 성령을 깨우지 못한, 자신을 확증시키지 못한 내게 있는 것이다.

요한의 독자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한 2세대 성도들이다. 광풍을 잠재우고 죽은 자를 살리며 병자를 일으키는 물리적 증거가 사라진 시대의 성도들인 것이다. 요한이 공관복음의 저자와 달리 7개의 이적만을 소개하고, ‘표적’이라는 용어로 초자연적 역사의 역할을 제한하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련과 시험이 몰려올 때마다 밖에서 오는 위로와 밖에서 주는 은혜를 갈구하던 성도들에게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시험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증거와 능력이 우리 안에 충분히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교회의 역사는 예수님을 만졌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성도들 안에 계셨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렀다. 상처와 시련, 때론 좌절과 두려움 속에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구원해 줄 슈퍼맨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성령을 깨워 함께 싸워야 하는 바로 내 자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예배와 기도는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내 안에 성령과 함께하겠다는 고백과 다짐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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