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태 목사(전주제자교회)
허드렛일이라도 주님 섬기는 일이라면 귀하게 여겨야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에스라 2:2)
유서 깊은 대학에 가면 ‘아너스 월’(Honors Wall)이라고 해서, 그 대학 출신 중 사회와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의 이름을 벽에 새겨 기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병원이나 사회복지기관에는 ‘도너스 월’(Donors Wall)이라고 해서 재정 기부자들의 이름을 새겨 놓기도 합니다.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겠다는 뜻입니다.
기억하고 기념할 만한 이름
하나님 나라 역사에도 기억하고 기념할 만한 이름들이 있습니다. 에스라 2장을 보면, 페르시아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예루살렘과 유다로 돌아온 백성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수많은 이름과 숫자를 상세하게 밝히는 이유는,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만큼 명예로운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당사자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을 때 70년 세월이 흘렀으니 끌려갔던 사람들은 다 죽었거나, 먼 여행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많아졌을 것입니다. 돌아온 사람들은 포로된 사람들의 후손들, 2~3대 자손들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돌아온 이유가 하나님 주신 마음의 감동 때문이라고 합니다.(스 1:5)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
하나님 주시는 마음의 감동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모험을 선택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당시 상황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세상을 호령하던 대제국에서 70년 동안 고생하며 닦아 놓은 생활 기반을 다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언약의 땅이요, 사명의 땅이었을 뿐입니다. 요컨대 그들은 하나님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익숙하고 안전한 삶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감동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역대하 2장에 이름이 기록된 분들은 하나님의 감동을 따라 모험을 선택해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앞장서 이끄는 리더
에스라 2장 2절에 기록된 열한 사람은 귀환하는 과정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페르시아를 떠나 돌아오는 길은 1400km 이상, 여행 기간만 최소 4개월 이상 소요되는 거리였습니다.(스 7:9) 여행 도중 호전적인 부족을 만나면 약탈을 당하거나,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스 8:31) 위험한 여정이었습니다. 비록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의 감동을 받았지만, 그 감동을 무시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용기를 내지 못해 주저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현실적인 이유를 들면서 왜 떠날 수 없는지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열한 사람은 돌아가자고 외치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격려하였을 것입니다.(스 8:15~20) 앞장서 이끄는 리더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동체든지 앞장서서 이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자고 외치는 리더가 있는가 하면, 악한 일을 하도록 유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히스기야와 므낫세를 생각해 보세요. 히스기야는 선한 일을 하자고 말했지만, 므낫세는 악한 일을 하도록 유다와 예루살렘을 유혹했다고 합니다. 므낫세처럼 악한 리더 덕분에 결국 예루살렘이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선한 일을 일구어내는 리더가 있는가 하면, 교회를 무너뜨리는 리더도 있습니다. 모쪼록 선한 일에 헌신하는 일꾼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면서 사명을 이루는 일에 앞장서서 헌신하는 일꾼 되기를 바랍니다.
가문, 동네 단위의 헌신
에스라 2장 3~20절은 가문과 가족들 단위로 돌아온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두 열여덟 가문입니다. 많지는 않아도 이들은 거룩한 명예를 얻은 가문이 됐습니다. 우리 가정·가문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명을 이루는 일에 온 가족들이 한마음 되고 있습니까?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명을 따라 헌신할 수 있도록 가정·가문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에스라 2장 21~35절은 지역단위로, 출신지나 동네별로 돌아온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두 스물한 개 지명이 나옵니다. 이들은 같은 동네 출신들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한마음을 품게 된 것 같습니다. 이 동네들은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함께 어울려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헌신할 수 있다면 명예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잊어버릴 수 없는 사명
에스라 2장 36~42절까지 제사장 가문, 레위 사람과 노래하는 찬양대, 문지기 집안의 이름이 나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없었습니다. 성전 없는 바벨론에 살면서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자기 사명을 잊어버리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성전이 무너지고 없었던 70년 동안에도 자기 신분과 역할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성전을 본 적도 없었을 것이요,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에 참여해 본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안 대대로 전수돼 오는 성전의 직임을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으로 받아 헌신했습니다. 대대손손 맡겨진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에스라 2장 43~54절까지 느디님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느디님 사람이란 가나안 일곱 족속의 후예들로서, 주로 성전의 허드렛일을 담당했습니다. 장작을 패거나, 물을 뜨는 등 꼭 필요하지만, 누구든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느디님 사람도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사실 나라가 무너지면, 이전 시대 신분 질서가 무너집니다. 이전 시대 하층계급이라도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코 귀한 신분이라 할 수 없는 느디님 사람들이 돌아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성전에서 수종 들며 허드렛일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히 바벨론 포로 70년을 지나면서도 자녀들에게 자신들이 맡고 있는 사명의 존귀함을 설명했고, 자녀들도 그 사명을 즐거이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누구든지 대접받고 인정받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느디님 사람들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느디님 사람처럼 하나님을 수종 들며 섬기는 것을 귀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허드렛일이라도 존귀하신 주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거룩한 이름 존귀한 명예
하나님이 우리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하십니다.(사 49:16) 다만 그처럼 사랑 많으신 하나님을 경외할 뿐 아니라 충성스럽게 헌신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기념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된 앞서간 믿음의 선조들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존귀한 이름이 따로 있습니다. 이기는 자의 이름을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시겠다” (계 3:5) 예수님이 선언하십니다.
믿음으로 사명 따라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씨름하는 사람들이 이기는 자들입니다. 요컨대 하나님 나라에서 존귀하게 여겨질 만큼 명예로운 이름이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