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식 목사(한국교회총연합 사무총장)
정부가 여성가족부의 명칭을 ‘성평등가족부’로 개편하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상정했다. 단순한 명칭 변경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문제다. 이는 행정조직의 외피를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근본 질서와 가치에 직결된 중대한 방향 전환이다.
보수 야당은 물론,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을 비롯한 종교계도 강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한교총 대표회장 김종혁 목사는 “두고두고 교회의 비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부 여당은 이 개정안이 대선 공약이고, 여성가족부 명칭이 특정 성(性)에 편중돼 있다는 점을 들며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으나, 그 논리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문제는 ‘성평등’이라는 단어가 중립적이지 않고 이념적이라는 데 있다.
무엇보다 성평등(Gender Equality)은 양성평등과 달리 단순한 남녀 간의 동등한 권리 보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 이 용어는 국제사회와 일부 학계에서 생물학적 성을 넘어선 ‘사회적 성’ 개념, 곧 제3의 성, 성별 자기결정권 등을 포괄하는 용어로 확장돼 사용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적 창조 질서뿐 아니라, 생물학적 성에 기반한 전통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헌법적 관점에서도 우려는 깊다. 대한민국 헌법 제36조 제1항은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된다”고 명시한다. 여기서의 ‘양성’은 명백히 남성과 여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정부는 이러한 헌법 정신 위에 세워진 국가 시스템을, 하위법인 정부조직법 개정을 통해 우회적으로 흔들고 있다.
선진국의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조차 ‘성평등’을 부처 명칭으로 직접 채택하지 않는다. 해당 개념이 아직도 사회적 합의가 미흡한 논쟁의 여지가 큰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이 민감한 개념을 행정 명칭에 도입하려 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어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동성애, 성별 다원주의, 차별금지법 등과 연결된 입법의 전초전으로 읽힐 수 있다.
정부는 “차별금지법 추진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으나, 이 개정이 결과적으로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빌드업’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와 같은 개정안이 나오게 된 배경과 추진 세력을 감안하면, ‘용어 변경’ 그 자체가 이미 강한 상징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더욱이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이 명칭을 둘러싼 이견이 존재한다. ‘성평등’이라는 표현이 여전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전제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즉, 지금 이 용어조차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방향은 성별 구분 자체를 넘어서려는 흐름이며, 이는 결국 사회적 가치의 근본 틀을 뒤흔드는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지금 저출산, 가족 해체, 청소년 성 문제 등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또한 국가의 미래와 생존이 걸린 무역전쟁이 진행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국가의 정책은 내부적 분쟁을 없애면서 가족의 가치를 지켜내며 공동체의 통합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은 오히려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하고 불필요한 가치논쟁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특히 ‘성평등’ 논쟁의 점화가 청소년과 학부모에게 미치는 문화적 영향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한국교회는 모든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존중한다. 그러나 진리 없는 관용, 기준 없는 포용은 결국 사회 질서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단순히 전통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온 국민적 합의이자, 헌법 질서를 지키는 가운데 발전시켜 가는 것이다.
정부는 이 문제를 단순한 행정 용어 변경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정직하게 성평등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국민 앞에 설명하고 ‘성평등가족부’라는 명칭이 우리 사회의 가치 체계에 미치는 파장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계속해 이 문제를 제기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갈등을 증폭시키는 용어의 전면 도입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 신중하고 균형 잡힌 논의다. 정부는 공동체의 건강한 지속을 바라는 모든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