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범 목사(산곡제일교회)
이용범 목사(산곡제일교회)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반면 남의 말을 경청(傾聽)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게 바로 현대인들이 깊이 있는 사랑을 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다. 사랑은 경청으로부터 시작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라. 말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운다. 말을 들어주지 않거나 무시하는 건,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사랑의 첫 번째 의무는 경청이다”라고 말했다.

‘왕의 귀’를 가지라! ‘듣는 귀’가 ‘왕의 귀’다. ‘들을 청(聽)’ 자를 자세히 보라. 왼쪽을 보면, ‘귀 이(耳)’ 자 밑에 ‘임금 왕(王)’ 자가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열 십(十)’ 자 밑에 ‘눈 목(目)’ 자를 옆으로 눕혀 놓은 글씨가 있다. 그 아래에는 ‘한 일(一)’ 자와 ‘마음 심(心)’ 자가 있다.

듣는 것은 ‘왕 같은 귀’를 갖는다는 뜻이다. ‘왕 같은 귀’란 ‘매우 커다란 귀’, 즉 ‘집중해서 듣는 귀’를 의미한다. 그럼 오른쪽 글씨는 무슨 뜻일까? 남의 말을 경청(傾聽)하는 것은 ‘열 개의 눈’을 갖는 것, 즉 말하는 상대방을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음’은 무슨 뜻일까? 상대방과 ‘한 마음’을 갖고 들어야만 경청할 수 있다는 뜻이다. 분산된 마음을 갖고는 진정한 경청 및 대화가 불가능하다. 상대방이 말하는 것에 ‘집중된 마음’을 가져야 경청이 가능하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말도 못한다. 외국어도 귀가 뜷려야 입이 열린다. 경청할 줄 모르는 사람의 말은 ‘장애 입은 언어’다. 믿음도 말씀을 듣는 데서 생긴다. 성경에 ‘들으라’는 말씀이 수도 없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 뭔가 말씀드리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 기도의 핵심은 간구가 아니라 경청이다. 하나님의 뜻을 여쭙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기도의 핵심이다. 따라서 기도할 때 적어도 3분의 1 이상은 듣는 데 할애해야 한다. ‘듣는 기도’에 힘써야 한다는 말이다.

경청은 또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지름길이기도 하다(以聽得心).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말에 귀기울여 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기 때문이다. 영업 분야에서 최고의 성과를 낸 고수(高手)들은 일반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말의 고수(高手)’가 아닌 ‘귀의 고수(高手)’들이다. 달변가(達辯家)가 아니라 경청가(傾聽家)다. 자동차나 보험의 판매왕들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대화 중 고객이 80%를 말하게 하고, 영업 사원은 20%만 말해야 합니다. 상품에 대한 영업 사원의 설명은 20% 정도면 충분합니다. 고객이 상품을 구매하려는 여러 이유 중 무엇을 중시하는지 스스로 말하게 해야 합니다.” 이처럼 경청은 하나님과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비법이다.

많은 교회의 담임목회자들이 당회나 제직회, 공동의회 인도를 힘들어한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렇다. 다음 주간에 있을 교단 총회는 개교회의 회의와 다를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속전속결식 의사 진행, 일방적·독단적 회의 운영, 불법· 편법·탈법이 묵인 또는 방조되는 의사 진행, 정당한 소수 의견 무시, 소수가 독점하는 발언권, 대부분의 총대들을 방관자로 만드는 회의 진행, 이견(異見) 제시를 인신 공격으로 오해하는 미성숙한 토론 문화, 총회 공동체보다 지역·출신 신학교·개별 단체의 이익을 더 중시하는 분파 이기주의….

‘통(通)하지 않으면 통(痛)한다’는 말이 있다. 서로 ‘소통’(疏通)하지 않으면 ‘고통’(苦痛)이 생긴다는 뜻이다. 길이 통하지 않으면 교통체증이 일어나고, 피가 통하지 않으면 동맥경화가 생긴다. 숨이 통하지 않으면 호흡곤란이 일어나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 오해와 갈등이 생긴다. 부부 갈등, 고부 갈등, 노사 갈등, 여야 갈등, 국가 간 갈등 등 사람들 및 조직 간에 생기는 모든 갈등은 말이 통하지 않는 데서 생긴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고통스런 일이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뭘까? 경청하지 않는 것이다.

“지혜는 들음에서 나오고, 후회는 말에서 나온다”는 영국 속담이 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듣기’보다 ‘말하기’를 더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후회투성이의 삶을 사는 것이다.

경청이 없는 언어는 사람들을 연결해 주지 못한다. 자기 표현의 욕망만을 분출한 채, 허공을 맴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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