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유럽의 역사는 가톨릭교회의 역사이다. 기 베슈텔이 쓴 <신의 네 여자>라는 책에서 가톨릭교회는 여성을 "타고난 창녀, 마녀, 터무니 없는 영적주장을 일삼는 곤란한 성녀, 그리고 최대로 관대한 평가라 할 수 있는 베카신(주-실수연발의 프랑스 만화 주인공)과 같은 아무 생각 없는 바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메리 위즈너-행크스는 "유럽에서 학식 있는 남성들은 많은 것에 관하여 의견의 일치를 이루지 못했지만, 유독 여성들이 침묵해야 한다는 견해에 있어서는 의견의 일치를 이루었다"라고 지적한다. 문제는 이러한 근대, 중세의 가톨릭교회의 여성관을 그대로 종교개혁자들이 답습한 데서 개신교 안에 ‘여성차별’이 그대로 대물림되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1장 33절의 "여자는 잠잠하라"는 구절을 근거로 교회는 전통적으로 여성은 목사나 신부가 되거나 교회에서 가르칠 수 없다고 여성의 지위와 활동을 제약했다. 사실상 이 구절을 근거로 여성을 차별하는 것은 성경의 원리 또는 교리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3장 28절은 "......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한다. 즉 인종적으로 하나이고, 또 신분적으로도 하나임을 말하며, 나아가 성으로도 하나임을 천명하고 있다. 그런데도 유독 교회는 전통적으로 같은 사도바울의 말인데도 고린도교회에서 한 말만 절대화하여 성차별을 하였다. 사실상 구약을 보아도 절대적으로 성차별은 없었다. 지엄한 모세 시대에도 민수기 27장을 보면 "슬로보핫의 딸들의 말이 옳으니(7)"라고 하면서 아들이 아닌 딸들에게 아버지의 재산이 상속되게 했다. 그뿐이니라 여자 사사 드보라(삿 4:4)도 있었다. 구약의 교회에서도 여자는 잠잠하지 아니했다. 신약의 교회를 보아도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언 역시 여성의 증언으로 시작되었다. 만일 여성이 잠잠했다면 부활의 증언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렇게 신약성경은 초대교회가 여성의 증언이나 가르침을 원천적으로 무시하지 아니 했음을 알 수 있다. 롬 16장에서 바울은 26명의 사람들을 열거한다. 이중에 8명이 여성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이러한 여성 동역자들과 협력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2세기는 시대적으로 여성을 차별해야 되는 시대는 아니다. 산업사회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남성보다 지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두드러진 여성이 많았다. 사실 이런 점에서 여성과 남성은 동등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여성은 열등하다고 열등성을 부각하여 차별하는 것은 현대판 ‘중세의 마녀사냥’과 같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에는 그리고 바울이 전한 복음에는 인종차별, 신분 차별, 성차별이 없었다. 그래서 개신교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만인 제사장임을 가르쳤고 인종과 신분, 성의 문제를 철폐하였다. 그런데도 유독 성차별의 문제는 철폐하지 못하고 그리스(헬라)의 문명 속에서 형성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남성의 용기는 명령하는데서 나타나고, 여성의 용기는 순종하는 것에서 드러난다."는 말에 근거하여 교회도 여성을 차별하였다. 이제 우리교단이 여성차별을 신학적으로 심화시켜 간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왜냐하면 진리는 항상 두 가지를 통해서 진리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는 진정성이고 다른 하나는 적실성이다. 진리에 진정성이 없으면 아무리 적실성이 뛰어나도 시대와 사람을 넘어서 소통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진정성이 뛰어나도 적실성이 없으면 진리는 진리로서 실행되지 않는다. 문제는 진정성도 드러나지 않고 적실성도 없는 진리를 진리라고 주장할 때 오는 폐단은 심각하다. 왜냐하면 '진리다움'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계속하여 교회 안에서 성차별을 고착시키며, 사회적으로도 교회 안에서의 성차별이 성경적이라고 이해(?)시키는 행위가 지속된다면 우리 교단은 22세기의 역사 속에서 명제적 신앙을 넘어서서 표현적 신앙도 잃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여성 사역을 폄훼하고 그 장을 열어 주지 못했던 우리 교단의 정서를 바꿔야 할 때가 되었다.

시기적으로도 늦은 감이 있다. 그러나 늦은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이 있듯이 늦지 아니했다. 만일 이 때를 놓치게 되면 우리 교회 즉 교단 안에 있는 여성 사역자들이 우리교단을 기하급수적으로 떠나게 될 것이며, 남성들만 남아 있는 교회가 되어 결국은 남성들도 떠나가게 될 것이다. 여성은 강단에 설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다는 주장은 신학적 편견과 성경의 왜곡(?)으로 인하여 생겨난 문제임을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더욱 지성적인 사람은 항상 기억하는 것, 의미 있는 것, 강조되는 것, 과거에 잘못 이해한 것들을 재정립하면서 현재를 규정하여 살아간다. 그러기 때문에 더 이상 고집부리면 안된다.

제110회 총회에서 여성 사역자들에 대한 폭넓은 기회가 주어지고 나아가서 남성 사역자들과 동등한 신분으로 교회를 섬기는 장이 마련되길 소망해 본다. 왜냐하면 과거의 역사를 명반(明礬)하게 이해하여 바로잡는 것은 항상 현재를 특정한 미래로 이동시키는 일종의 지렛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 지렛대의 역할을 하는 총대들이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총회의 미래가 밝아지고 교회가 늘 개혁되어지는 교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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