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철 목사(꿈에그린우리교회)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삼상 15:23)
사울은 아말렉 진멸의 결과를 놓고 갖은 변명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이거 보세요. 이 정도면 잘 한 거 아닙니까. 시킨 대로 아말렉도 진멸하고 제사 때문에 가축 조금 남긴 것이 그렇게 문제입니까.” 이에 사무엘도 성토한다. “누가 제사 챙기라고 했나요. 말씀대로만 하면 될 거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셨잖아요. 도대체 누구에게 인정받고 싶은 겁니까.” 그렇게 사울의 변명을 모질게 떨쳐낸다.
사울은 왕이 될 때 ‘세력 좋고 집안 좋은 가문이 줄을 섰는데 내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나’ 생각했다. 겸손한 태도 같지만 여기에 사울의 인식이 묻어난다. 그는 왕 정도 되려면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보다 아무래도 강한 지지기반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래서일까. 왕이 된 후에도 집요하게 업적에 매달리고 백성들의 추앙과 인정을 위해 무리수를 둔다. 그 결과 사울은 내면을 지배하는 인정욕구를 감추고 겉으로만 순종하는 시늉을 했다. 이런 완고함은 마지못해서 하는 순종, 책임지지 않는 순종을 낳았다. “당신이 시켜서 한 일 아닙니까. 그러니까. 안 된다고 했잖아요.” 이런 식이다. 순종하면서도 줄곧 딴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순종은 끝까지 기꺼이 따르겠다는 마음이 필요하다. 내가 믿었고 내가 한 순종이다. 사무엘이라면 어땠을까. 사울이 보여준 형편없는 태도로 인해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15:11) 하셨을 때 사무엘은 “그러니까. 제가 처음부터 왕 세우지 말자고 했잖아요. 사울은 좀 찜찜했다니까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우리는 그가 어떤 마음으로 온 밤을 부르짖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 제 잘못입니다. 곁에서 돕지 못한 제 책임입니다. 그래도 하나님, 이렇게 그를 버리신다면 이 나라가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더 잘 챙기겠습니다.” 눈물 기도가 온 밤을 채웠다. 이것이 순종에 책임지는 자의 태도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의 반응이다. “내가 이렇게 낙심이 되고 속이 상한데 하나님은 오죽하실까.” 사무엘은 순종하지 않는 듯 보였으나 순종했고 사울은 순종하는 듯 보였으나 사실은 완고한 자였다.
19세기 체코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는 한 권의 책을 읽고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이런 말을 한다.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네.” 그는 책을 통해 고집스레 붙들고 있던 완고한 생각들을 깨버렸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다. 내가 붙들고 있던 미숙한 습관, 고착되어 온 신념. 내 안에 상처까지도 깨닫게 하시고 깨뜨리고 부순다.(히 4:12)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와도 같이 말씀으로 내 완고함을 깨뜨리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겉도는 순종만 하게 될지 모른다. 온전한 순종을 위해, 얼어붙은 내 완고함을 깨기 위해 말씀의 바다로 은혜로운 항해를 떠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