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잠 19:18)

 

채철 목사(꿈에그린우리교회)
채철 목사(꿈에그린우리교회)

사람의 감정에서 분노는 매우 다루기 어려운 양날의 칼과도 같다. 분노를 적절하게 다루지 못하면 마음에 큰 상처가 나고 관계가 끊어지며 인격은 무너지고 만다. 그러면 분노란 나쁜 것인가. 무조건 통제하고 눌러야 할 감정인가. 그렇다면 이리도 쓸모없는 감정을 하나님은 왜 만드신 걸까.

오늘 말씀은 분노의 순기능에 주목하게 한다.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 자식을 징계할 때 죽일 마음을 두는 부모가 어디에 있을까. 분노의 이유와 목적을 잃으면 상처가 남고 관계는 폐허가 된다. 자녀는 화풀이 대상이 아니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할 대상이다. 분노에는 끝장 분노와 소망의 분노가 있다. 앞에서 아들을 징계하되 죽일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했는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개역한글 성경에는 ‘소망이 있은 즉’이라고 했다. 아무리 분노해도 소망의 여지를 남겨야 한다. 다음에는 잘해보자고 분노하는 것 아닌가. 아이가 놀다가 늦게 들어왔을 때 부모가 분노하는 이유는 다음부터는 늦지 않도록 하는 게 목적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 “서로 언성을 높이다가도 마지막 말은 아끼세요.” 이게 무슨 말인가. 다시 만날 수 있는 여지, 관계를 회복하고 대화할 수 있는 여지는 남기자는 말이다. 그래야 더 과격해지지 않고 파괴적이거나 위험한 결과를 막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날 성전에 가셨을 때 성전은 엉망이 돼 있었다. 소나 양, 비둘기파는 사람들이 성전 안까지 밀고 들어와 진을 치고는 여기가 시장인지 성전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북적였다. 이때 예수님은 분노하셨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다 쫓아 보내고 환전하던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버리고 상을 엎으셨다. 언뜻 보기엔 예수님께서 성전을 더 난장판으로 만드신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서 들었던 채찍은 노끈으로 만든 채찍이었다. 성전 안에 짐승들을 쫓아내는 게 목적이었다. 시장 같았던 성전은 아수라장이 되는 듯 보였으나 이날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하나님께서 심판을 목적으로 분노하셨다면, 끝을 내기로 작정하셨다면 하늘에서 불벼락이 떨어지고 장사하던 사람, 이런 일을 하도록 뒤를 봐주던 제사장이나 사두개인들은 그 자리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조차도 변화되어야 하겠기에 이들도 영생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야 하겠기에 끝장을 내시지 않고 소망이라는 여지를 남기셨다. 역설적이게도 이날 예수님께서 보이신 분노에는 인자하신 성품이 묻어난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리의 감정을 지혜롭게 쓰기 위해 애써야 한다. 특별히 분노라는 감정을 쓸 때는 순기능의 목적을 갖고 살리고 세우는 일을 위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여지를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 어쩌면 일그러졌을지 모를 우리네 감정을 들여다보며 주님 닮은 성품으로 회복돼 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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