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 인물】 소록도연합교회 김선호 목사
2011년 소록도연합교회 담임으로 부임
역사사적지 지정 신앙유산 전수 노력
4월 정년 은퇴…“전도 사명 감당 희망”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에 있는 섬 소록도. 모양이 사슴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섬 이름만 보면 평범하나 한센인 환우들의 수용소가 위치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아픔이 묻어있고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진 역사가 배어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사에서 이 섬은 신앙의 섬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소록도 주민과 15년간 동고동락하며 예수를 전하고 예수처럼 사는 본을 보이려고 했던 한 목회자가 곧 교회를 퇴임한다. 소록도연합교회 담임 김선호 목사의 삶과 신앙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목사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강원도 홍천 출신으로 23세에 소명을 받고 신학을 했습니다. 총신을 77회로 졸업했고 현재 52년째 사역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30년 전 신학교 동창 목사님의 권유로 한센인 목회사역에 발을 들여놔 경남 함안의 한센인정착촌에서 15년 목회했습니다. 2011년 소록도연합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서 지금까지 왔으며 오는 4월 21일 제가 속한 남중노회에서 정년퇴임을 허락받을 예정입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할 때 소록도는 어떤 섬입니까?
=소록도는 눈물의 섬입니다. 또 신앙의 섬입니다. 소록도에는 굽이굽이 눈물이 배어 있으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도 넘쳤습니다.
소록도에 한센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 때였습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서양 선교사들이 한센인 치료를 도맡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늘어나는 한센인들을 기존의 요양소에 맡기지 않고 소록도에 이주시켰습니다. 이때가 1910년입니다.
소록도에 강제 이주한 한센인들은 성치 않은 몸으로 불모지에서 삶의 터전을 일궈야 했습니다. 한센인들은 병원을 세우고 바닷가에 축대를 쌓아 올렸습니다. 그들 신체 특성상 땀을 흘리면 안 되는데 벽돌을 굽는 험한 일을 강제로 해야 했습니다. 노동을 하다가 사람이 죽거나 다쳤고 고된 생활을 견디다 못해 바다를 헤엄쳐 탈출을 시도하다가 익사한 사람도 나왔습니다. 이후로도 소록도 한센인들은 근현대사의 격변이 있을 때마다 인권을 유린당했고 각종 수모를 겪었습니다.
초창기 기록을 보면 한센인들은 소록도에 입주하고 가족과 생이별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소록도에서 부모와 자녀를 같은 집에서 지내지 못하게 했습니다. 별개의 공간에 가둬두고 한 달에 한 번 면회를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그 면회라는 것도 부모 자식 간에 손 한번 잡도록 했던 것이 아닙니다. 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서로 바라보며 눈인사만 하도록 했습니다.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 아픈 장면이 아닙니까? 그들이 지척에서 왕래하지 못했던 그 길을 근심과 탄식의 공간이라는 뜻을 담아 ‘수탄장’(愁嘆場)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슬픈 사연이 있는데 왜 신앙의 섬이라고 하십니까?
=소록도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는 녹동이었습니다. 바닷길로 600m 거리입니다. 소록도에서 삶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여기를 헤엄치려다가 여럿 죽었습니다. 하루는 일본인 병원장이 도망치다가 잡힌 이들을 불러놓고 목숨을 걸고 탈출하려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답변이 나왔습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십시오.”
이 말을 한 사람들은 장로교회를 다녔던 최재범 김금영 박장영이었습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하려 했던 일도 대단했지만 서슬퍼런 일본인 원장에게 신앙생활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한 일도 용감했습니다. 다행히 당시 일본인 원장은 그들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인 전도목사가 파송됐고 1922년 교회가 시작됐습니다.
이후로도 소록도의 기독교인들은 호의적인 원장이 있을 때는 신앙의 자유를 누렸으나 악의적인 책임자가 왔을 때는 핍박을 당했습니다. 육신의 질병과 그들을 둘러싼 환경 때문에 피곤했던 소록도 주민들에게 유일한 위안은 신앙이었습니다. 경제활동을 하지 못했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신병을 치유하는 처지였지만 한때 7개의 예배당을 세웠던 것도 성도들의 남다른 신앙심 때문이었습니다. 전 주민의 80%가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소록도교회 출신으로 육지에 나가서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 교회 지도자가 된 이들이 많습니다.
소록도는 외부에서 인구가 거의 유입되지 않습니다. 소록도에 남아 있는 이들은 연로해지고 한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1960년대 소록도 인구는 4000여 명이 넘었으나 현재 500여 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아직 320여 명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소록도연합교회에 부임하신 후 어떻게 사역하셨습니까?
=소록도에는 한때 7개 교회가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부임했을 때는 5개 교회가 운영됐습니다. 지금은 사실상 3개 교회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교역자 한 분과 함께 예배를 인도하는 일을 합니다.
주일 오전 예배는 중앙교회 8시, 신성교회 8시, 동성교회 10시, 이렇게 있습니다. 같은 시각인 중앙교회와 신성교회는 저와 다른 교역자가 나눠서 인도하고 저는 첫 예배를 마치면 동성교회로 갑니다. 주일 오후는 중앙교회와 신성교회가 오후 3시 40분, 동성교회가 4시 20분에 드립니다. 새벽기도와 수요예배도 2부제로 드립니다.
소록도에는 연로한 환우와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심방하고 장례예배를 인도하는 것이 또 하나의 사역입니다. 저는 소록도연합교회 담임으로서 성도들의 성숙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르치고 본을 보이려고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시무하시는 동안 소록도교회가 우리 교단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먼저 2014년 김정복 목사님의 묘소를 복원했습니다. 김정복 목사님은 해방 직후인 1946년 소록도교회에 부임하셔서 교회를 재건하셨고 6·25전쟁 때 순교하셨습니다. 김 목사님은 애양원 손양원 목사님과 쌍벽을 이루는 한국교회 대표적 순교자이십니다.
2019년 총회에서 소록도교회를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제12호)와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제3호)로 지정하는 일에 노력했습니다. <소록도교회사>를 편찬해 소록도교회가 걸어온 100년 역사를 남겼습니다. 남성교회를 복원했습니다. 소록도 신앙의 역사를 후대에 전수하기 위해 역사기념관을 건립하고자 했고 이제 설계 막바지 단계까지 왔습니다. 소록도를 기억하시고 기념관 사업을 위해 총회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재정을 지원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소록도에는 유서 깊은 신앙 유산이 많습니다. 소록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예배당, 최초 예배당 역할을 했던 구북리 1호사 건물, 이곳에서 인간으로서 권리와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목숨 걸고 투쟁한 이들의 자취를 보여주는 중앙공원, 역사관, 중앙교회 앞마당에 세워진 김정복 목사 기념비, 6·25전쟁 중 김정복 목사의 기도처였던 굴날뿌리가 있습니다. 소록도 인구가 줄어듦에 따라 소록도의 미래는 바뀔 것입니다만 소록도를 위해 뿌려진 성도들의 눈물과 순교의 피는 모두의 가슴 속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은퇴 후 계획은 무엇입니까?
=제 아들이 사는 수도권 지역으로 이사할 생각입니다. 그곳에 거처를 정하고 힘닿는 데까지 주의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한평생 목회자로 살았고 한센인 사역을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연약하고 상처 입은 성도들을 심방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저의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을 전하고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참 감사할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소록도교회를 기억하시고 시간이 되신다면 방문해 주시고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