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환 목사(군산 동광교회)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순종할 때 비전은 현실이 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오랫동안 품었던 꿈이 좌절될 때, 기도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와 같은 경험들이 종종 있으시죠? 우리는 이런 순간에 “이제 다 끝났어…”라고 느끼곤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은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예수님이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허무하게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동시에 그들의 꿈도, 비전도, 삶의 의욕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어떤 제자는 다시 어부가 되었고, 어떤 제자는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절망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놀라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막달라 마리아가 말합니다.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이야기합니다.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심지어 의심 많던 도마도 말합니다. “내 손으로 그분의 상처를 만졌다!” 고향으로 돌아가 고깃배를 타던 베드로도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사했다고 말합니다.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이 말씀은 즉 “이제 너희가 움직일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부터 ‘비전행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비전(vision)이란 무엇입니까? 간밤에 꾸고 아침이면 잊히는 그런 꿈이 아닙니다. 비전은 내 삶의 방향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비전은 내 삶의 목적을 말합니다.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비전은 내 삶의 행동을 말합니다.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발견되는 비전은 항상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전은 운동입니다. 여기서 ‘동(動)’이란 글자에는 움직이다. 살아나다, 변화하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움직입니다. 습자지에 물방울이 떨어져 번져가듯이, 세상을 물들이며 번져가는 운동을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가 자유케하는’ 영혼의 회복, 십자가 복음으로 통치하시는 나라. 우리의 비전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비전은 멈춰있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행전입니다. 사도행전, 성령행전입니다.
1. 비전은 우리가 하나님의 심정을 품을 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었습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여기서 비전이 움직이는 방향을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나의 가정과 직장과 친구에 해당된다면 ‘유대와 사마리아’는 내가 속한 사회와 이웃들을, ‘땅 끝’은 열방과 다음세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비전은 내 안에서 시작하여 세상 끝까지 퍼져나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세상 끝은 바로 우리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마음을 품은 비전인생이 되라고 열심히 제자훈련과 비전트립을 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며 남기신 이 말씀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예수님의 심정을 담은 당부였습니다. 우리와 다음세대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비전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2. 비전은 우리가 순종할 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비전은 단지 꿈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순간부터 비전은 현실이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지금 당장 가서 전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다렸습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했고, 충분히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얼마든지 나가서 주님을 증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혹시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복음을 전파했다면 더 강력한 증거가 되고, 더 설득력 있는 전도가 되고, 유대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사실적 증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될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성령을 기다리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러 나갔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순종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움직이다가 실패한 사례들을 우리는 성경에서 숱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의 순종이 없었다면 비전행전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그 결과,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비로소 제자들은 힘을 얻고, 복음을 전파하는 비전행전을 이루어 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비전의 사람은 내 뜻, 내 생각, 내 신념과 경험이 아닌 하나님의 심정을 품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3. 비전은 성령의 능력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성령을 받기 전의 제자들은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채, 그 뒤에 숨어 떨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후의 제자들은 잠갔던 문을 활짝 열고 당당하게 성전을 향해 올라갑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 그분의 이름밖에 없다고 선포합니다.
베드로가 담대히 나아가 설교했을 때,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행 2:41)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혀도 기뻐했습니다.(행 5:41) 스데반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예수님의 얼굴을 닮은 모습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행 7:55) 무엇이 제자들을 이렇게 변화시켰습니까?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
여기에서 권능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두나미스(δύναμις)’입니다. 주로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권능, 기적적인 역사를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이 단어가 영어로 파생되어 ‘다이너마이트’ 즉, 폭발적인 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두나미스’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깊이 박혀 꿈쩍하지 않는 바위마저도 깨뜨려 길을 만드는 그 힘처럼, 성령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면 불가능했던 일들도 가능해집니다.
사도행전 속에 임하신 성령의 능력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충만히 임하시길 축복합니다. 성령의 권능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복음을 전파하는 강력한 힘을 공급합니다. 사도행전에 임하신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여, 비전행전의 삶을 살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직도 “나는 연약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가 감당치 못했던 일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나미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옵소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주신 비전이 땅 끝까지 흘러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