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독립군 소년병으로 성장
50세에 항일투쟁 위한 군입대 결행
유한양행 창업으로 바른 기업윤리 제시
경영이익 사회에 환원하고 전 재산 기부

평생 ‘애국’과 ‘신앙’이라는 가치를 좇아 살았던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 박사.
평생 ‘애국’과 ‘신앙’이라는 가치를 좇아 살았던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 박사.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우리가 화장지 광고로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 구호는 사실 40년이나 된 캠페인 구호이다. 그리고 이 구호에는 한 기업인의 뜨거운 민족애와 애국신앙이 담겨 있다.

애국신앙으로 자란 어린 시절

유한양행의 창업주 유일한 박사의 원래 이름은 유일형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경북 예천 출신의 유기연으로, 가난을 면하기 위해 찾아간 새로운 거처 평양에서 한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예수를 믿고 세례교인이 되었다. 바로 평양신학교를 설립한 장로교 선교사 사무엘 마펫(한국명 마포삼열)이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 박장현과 함께 촬영한 아홉 살 소년 시절의 유일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 박장현과 함께 촬영한 아홉 살 소년 시절의 유일한.

그렇게 입문한 기독교신앙을 통해 유기연에게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단순히 돈만 잘 버는 인생이 아니라, 기울어가는 조국을 다시 일으키는 삶을 살고자 결심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업으로 번 돈을 항일운동 자금으로 희사할 뿐 아니라,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감시를 피해 북간도로 이주한 후에는 한인교회와 교육기관 설립을 주도하며 독립운동의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다.

특히 6남 3녀의 자녀 모두를 외국으로 유학시키며 겨레의 일꾼으로 성장하도록 뒷받침했는데, 1895년생인 둘째 아들 유일형은 미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1904년 아홉 살의 유일형은 미국으로 떠난다. 하지만 그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일형의 유학생활은 위기에 봉착했다. 다행히 일형은 네브래스카주 커니시에 사는 터프트 여사의 집안에서 가사를 도우며 숙박을 제공 받는 조건으로 학업을 이어나가게 됐다. 특히 신실한 침례교인이었던 터프트 일가는 경건한 신앙의 삶을 일형에게 몸소 보여주는 영적 스승이 됐다.

항일 소년병에서 냅코작전까지

미국에 건너가 알게 된 사람들 중에 일형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박용만이었다. 미국 내 대표적 한인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박용만은 미래의 독립군들을 양성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네브래스카에 1909년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웠다. 일형은 이 학교에 가장 어린 학생으로 입학했다. 이 무렵 ‘유일형’에서 ‘유일한’으로 개명이 이뤄지기도 했다.

유일한은 여름방학 기간 운영되던 이 학교에서 3년 동안 재학하며 오전 6시에 기상나팔과 함께 일어나 농사, 학습, 군사훈련으로 밤 9시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견뎌냈다. 

이 시간들은 그에게 더욱 강인한 심성과 체력을 키워줬다. 특히 소년병학교 2년 차에 들려온 한일병탄의 소식은 유일한에게 깊은 분노를 일으킨 동시에, 겨레의 자주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결단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언젠가는 독립군 사령관이 되겠다’는 것이 이 시절 유일한의 포부였다고 전해진다.

한인소년병학교 시절의 유일한(앞줄 오른쪽 끝).
한인소년병학교 시절의 유일한(앞줄 오른쪽 끝).

그 꿈이 현실로 다가온 것은 무려 30년 세월이 흐른 뒤였다. 1941년 12월 재미한족연합회 주도로 당시 일본과 태평양전쟁을 개시한 미군을 돕고, 같은 시기 일제에 선전포고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는 ‘맹호군’ 창설이 추진된 것이다. 맹호군 창설에는 유일한을 비롯해 소년병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여러 동지들이 동참했다.

독립운동가로서 유일한의 삶을 조명한 뮤지컬 의 포스터.
독립운동가로서 유일한의 삶을 조명한 뮤지컬 의 포스터.

이와 같은 유일한과 한인들의 적극적인 항일 군사행동은 ‘냅코작전’으로 이어진다. 냅코작전이란 미국전략첩보국(OSS)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재미한인들을 한반도에 직접 침투시켜 특수공작을 수행하려던 계획을 말한다.

최소 19명의 재미한인들이 냅코작전을 위한 특수부대에 동참한 가운데, 유일한도 부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이미 50세의 나이에다 커다란 기업을 경영하는 안정된 신분이었음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지기로 한 것이다.

당시 부대책임자의 보고서에 따르면 유일한은 냅코작전에 참여하고자 1945년 1월 미군에 입대하고, 2월 2일부터 캘리포니아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유일한은 자신이 한국에서 운영하는 유한양행 조직망을 냅코작전에 활용하겠다는 계획도 세우고, 침투작전에 함께 할 한국인 대원들까지 직접 선발했다.

침투훈련까지 마치고 출발을 기다리던 유일한과 부대원들은 그해 8월 일본이 먼저 패망하면서 아쉬움을 삼킨 채 해방을 맞이했다.

민족기업가와 교육자로서 공헌

유한공업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를 설립하며 유일한은 교육가로서도 애국을 실천했다. 
유한공업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를 설립하며 유일한은 교육가로서도 애국을 실천했다.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온 유일한은 기업인으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서 생애를 이어간다. 그의 이름에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이름인 ‘유한양행’은 이미 그가 1926년 서울 종로에서 창업한 기업이다.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내용을 담은 유일한의 유언장.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내용을 담은 유일한의 유언장.

미국에서 대학과정까지 마치고 중국계 의사 호미리와 결혼하며, 사업가로 활동하던 유일한은 당시 세브란스의전에서 사역하던 애비슨 선교사로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해 달라는 초청을 받는다. 고심 끝에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왔지만, 그의 발걸음은 대학으로 향하지 않았다. 귀국 짐에는 수많은 의약품들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 조국의 상황을 생각해볼 때, 가장 필요한 분야가 의약품사업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유한양행은 최초의 개발상품 ‘안티푸라민’을 비롯해 수많은 의약품들이 가정 상비약으로 애용되며, 큰돈을 벌었다. 그 이익들은 대부분 사회에 환원됐다.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들에 의약품을 무상 기증하는가하면, 셔우드 홀 선교사가 결핵 퇴치를 위해 창안한 크리스마스 씰 사업에 비용을 보태었다. 종업원들에게 회사 주식을 액면가 10% 정도 가격으로 나눠주며 한국 최초로 직원주주제도를 실시하기도 했다.

민족기업으로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유한양행의 현 사옥 전경. 
민족기업으로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유한양행의 현 사옥 전경. 

유한양행에 이어 유한킴벌리 창업을 통해서도 최초 국산화장지 ‘뽀삐’ 등 인기상품들을 개발하며 많은 이익을 남겼다. 우량기업에 대한 소문을 듣고 정치권에서 자금을 요구하곤 했지만 전혀 응하지 않았고, 때로는 보복성격의 세무조사를 받고서도 아무런 탈세혐의가 나타나지 않아 도리어 우량납세자 표창을 받은 일도 있었다.

인재양성을 위해 1962년 재단법인 유한학원을 설립하고 이후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중학교를 개교했다. 유일한은 1971년 3월 11일 세상을 떠나면서 학교재단에 자신의 재산 모두를 기부했다. 기업 또한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대신,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모범을 보여줬다. 남은 것이라고는 구두 두 켤레와, 양복 세 벌이 전부였다.

그에게는 국민훈장 모란장(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1971) 건국훈장 독립장(1995) 등 온갖 영예가 주어졌다. 하지만 그가 더 명예롭게 여겼을 호칭은 ‘독립운동가’ ‘민족기업가’ ‘참 신앙인’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는 진정으로 우리 사는 세상을 ‘푸르게, 푸르게’ 만들었기에.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2024년을 보낸 우리는 새로운 2025년을 또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애국신앙의 표본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살다간 유일한의 삶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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