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호 목사(소록도교회)

생명의 면류관 향해 나아가는 삶이 됩시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김선호 목사(소록도교회)
김선호 목사(소록도교회)

잠들었던 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내 고향

강아지도 같이

뛰놀았던 내 고향

남아있는 친구는

좋겠다

아아~ 나도

고향에 가고 싶다

김희경 시인의 ‘내 고향’이라는 시입니다. 소록도의 한센인들은 이런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살다 가야 했습니다. 정든 고향과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이 작은 섬에서 생을 마감해야 하는 현실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요? 만약 그들의 영혼 가운데 천국소망이 없었다면 소록도 한센인들의 삶은 훨씬 더 비참하고 고단했을 것입니다.

소록도에서는 그동안 수많은 죽음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기억되는 두 사람의 죽음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소록도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맡았고 타인에 의해 목숨을 잃은 공통점이 있지만, 죽음의 결과는 서로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께 심판을 당하는 표본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거룩한 순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우상숭배 강요하다 받은 심판

신명기 5장에서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신 5:8)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질투하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3~4대까지 벌하실 것이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이 같은 계명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소록도에 제4대 원장으로 부임한 수호 마사키였습니다. 수호 원장은 매월 1일과 15일에 사람들을 한곳에 모았습니다. 신사참배를 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사참배로 인한 고통은 소록도 안이나 밖이나 똑같았습니다. 육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소록도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얻어맞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소록도의 성도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고난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수호 원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매월 20일에도 모여야 한다는 새로운 지시를 소록도 사람들에게 내렸습니다. 기가 막히게도 섬 안에 새로 건립한 수호 원장 본인의 동상 앞에서 은혜에 감사하며 절하도록 ‘보은감사일’이라는 날을 정해 실시한 것입니다. 그 동상조차도 소록도 사람들에게 강제로 노역을 시키고, 3개월분 노임에 해당하는 성금을 걷어가 건립한 것이었습니다.

한 달에 세번씩이나 모아놓고 억지로 우상숭배를 시키는 것으로도 부족해 애국반 회의, 시국강연회 참석, 할당된 벽돌 굽기, 가마니 짜기, 송진 따기, 숯 굽기, 토끼가죽 제조 등 온갖 노동에 사람들을 동원했습니다. 불평불만은커녕 잠시 웃고 떠드는 것조차 엄두를 낼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소록도 사람들은 애굽의 노예생활, 바벨론의 포로생활과 다름없는 고통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마침내 수호 원장의 교만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1942년 6월 20일 ‘보은감사일’에 많은 사람들이 동상 앞에 모여 있고, 수호 원장이 승용차를 타고 들어와 그 앞에서 사열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경북 성주 출신의 27세 젊은이 이춘상이 갑자기 달려들어 수호 원장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것입니다. 순식간에 수호 원장의 숨이 끊어졌습니다.

비록 이춘상은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지만, 그의 희생으로 인해 수호 원장의 학정이 온 세상에 낱낱이 밝혀질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소록도 항일운동사의 자랑스러운 한 페이지이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들의 최후를 두고두고 보여주는 신앙적 교훈의 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으로 사명 감당하다 맞이한 순교

수호 원장의 죽음과 완전히 대조되는 또 한 명의 죽음이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해방 후 소록도교회에 부임한 샛별 김정복 목사입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소록도 성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숨어서 은밀하게, 온갖 핍박을 견디며 예배하던 시간이 끝나자 사람들은 다시 모여 교회를 재건했습니다. 마침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가 김정복 목사를 대동하고 소록도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김정복 목사가 인도한 열흘 동안의 사경회가 끝나자, 사람들은 소록도교회의 새로운 담임목사로 김 목사를 모시기로 결정합니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태어난 김정복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제주 성내교회, 벌교읍교회, 고흥읍교회, 길두교회 등을 섬겼습니다. 특히 해방 직전에 신사참배 문제로 일제에 검거되어, 3년 6개월 동안이나 감옥에서 지내며 고초를 겪은 바 있기에 당시 소록도 사람들은 김 목사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김정복 목사는 사명에 신실하고, 사랑이 충만한 목회자였습니다. 소록도의 한센인들을 마치 자신의 혈육인 것처럼 품어주며,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소록도 사람들은 점점 믿음이 자라났습니다. 섬 전체가 복음화 되면서 소록도에는 일곱 개의 교회가 생겨났고, 매주 열정적인 예배와 엄청난 부흥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말 그대로 호사다마(好事多魔)와 같은 상황이 소록도에서 또다시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6·25전쟁 발발로 남침한 인민군이 밀고 내려와 소록도를 점령한 것입니다. 섬에는 또다시 소용돌이가 몰아쳤습니다. 좌익관리자가 배치되고 인민위원회가 조직되면서, 모든 교회의 예배는 중단됐습니다. 예배당은 공회당으로 바뀌었습니다. 김일성 사진이 예배당 한가운데 걸리고, 성도들은 찬송가 대신 인민군가를 불러야 했습니다.

이렇게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김정복 목사는 피신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물리치고 소록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양떼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라며 굴날뿌리라 불리는 바닷가 동굴에 숨어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밀고로 결국 김정복 목사는 체포되었고, 서울 수복 후 패퇴하던 인민군의 총격을 받아 1950년 9월 30일 고흥경찰서 뒷산에서 순교의 면류관을 썼습니다. 그의 나이 69세였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씁시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두 사람의 죽음이 별 차이가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전혀 다른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내게 주리라”(계 2:10)는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월에 흘러서도 기억되는 죽음, 가장 값진 보상이 기다리는 죽음. 김정복 목사는 이 땅에서도 순교자로 추앙 받고,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로 기념하는 보상을 받았지만 천국에서는 더 큰 상이 그 앞에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인생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기를 기대하십니까? 생명의 면류관을 소망하신다면, 약속의 말씀처럼 죽도록 충성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약속에 신실하신 주님께서 그 수고에 반드시 보응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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