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호 목사(소록도교회)
주님은 때마다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 48:14)
‘사슴’이라는 뜻을 지닌 육지의 포구 녹동과 소록도 사이는 바닷길로 600m 거리가 됩니다. 그런데 소록도에 수용된 사람들 중에서는 살아보겠다고 이 짧지 않은 거리를 한밤중에 헤엄쳐서 탈출하려다가 바다 물살에 쓸려 떠내려가거나 물에 가라앉아 익사하는 사고가 종종 벌어졌습니다.
일본인 원장은 도망치다가 붙잡힌 이들을 불러다가 목숨까지 걸고 탈출하는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뜻밖의 답이 나왔습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대구에서 온 최재범 김금영 그리고 부산에서 온 박장영 등 세 사람은 본래 장로교 성도들이었습니다. 마치 느부갓네살 앞에 선 다니엘의 세 친구처럼, 그들은 스스로의 처지에 주눅 들지 않고 도리어 당당하게 예배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원장에게 요구했습니다.
소록도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들
이전 원장 시절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었겠지만, 새로 부임한 하나이 젠키치 원장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록도 사람들을 향해 긍휼한 마음을 갖도록 그의 마음을 열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하나이 원장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마침 전라도 광주에서 전도사역을 하던 일본성결교회 소속의 다나카 신자부로 목사에게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리하여 다나카 목사는 포교 허락을 받고 소록도에 들어와 이틀 간 한센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전도집회를 열 수 있었습니다. 집회의 첫 날인 1922년 10월 2일은 바로 소록도에서 예배가 처음 시작된 날이기도 합니다. 다나카 목사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 역시 소록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였다고 믿습니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소록도교회의 시대가 열립니다. 처음에는 모일 장소가 없어 야외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몇 곳을 전전하며 예배를 이어가는 시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초창기 예배 처소였던 소록도 구북리 1호사 건물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이듬해부터는 박극순이라는 인물을 하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광주에서 온 그는 다나카 목사의 설교를 통역하고, 찬양을 지도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인원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1923년 11월 10일에는 남녀 44명의 성도들이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고, 다시 2년이 지난 후에는 교회의 일꾼들에게 전도원, 집사, 방문원 등의 이름을 붙여 정식 임명합니다. 이 무렵 주일학교도 조직되었습니다.
하나이 원장 그리고 그 후임인 아자와 준이치로 원장처럼 교회활동에 호의적인 인물들의 배려 속에서, 소록도는 점점 믿음의 동산으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이들 덕분에 소록도에 정식으로 첫 예배당이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1928년 소록도병원과 병사시설을 확장할 때, 예배당을 신축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놀랍게도 예배당이 세워진 자리는 본래 일본인들이 천황의 시조로 숭배하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섬기던 자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당 안에 필요한 강단 풍금 시계 종탑 등 각종 비품들을 마련해주기까지 했습니다.
시대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이처럼 하나님이 세우신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하여 소록도에는 수많은 이야기 거리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이야깃 거리들이 모여 오늘날의 소록도교회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디 소록도만의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은 항상 적절한 때에, 적절한 사람들을 통해 이 땅의 교회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앞으로도 영원까지 그렇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 48편은 고라 자손의 시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수많은 원수들로부터 그의 백성을 건져 내셨음을 감사하며, 성전에 모여 기쁨으로 주님의 이름을 송축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성 시온을 이방국가들의 공격으로부터 건져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위대한 권능과 한결같은 사랑으로 이스라엘을 지키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이 땅의 교회들과 성도들을 같은 권능과 사랑으로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시편 기자처럼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 48:14)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놀라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받아 누리는 존재들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온 세상에 드러내도록 부름 받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본문 2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시온성을 일컬어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의 통로로서 온 세상의 기쁨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행하심을 후대에 전하라
초대교회인 북부교회에 이어, 1928년 남부교회, 1933년 동부교회(현 신성교회)가 소록도에 세워집니다. 이후 감리교 목회자가 부임하며 성결교회 시대에서 감리교회로, 해방 후에는 다시 장로교회로 변신이 이루어졌지만 소록도에는 계속해서 동성교회(1937년) 중앙교회(1938년) 서성교회(1938년) 장안교회(1946년) 그리고 병원 직원들 중심의 소록도교회(1951년)가 세워지면서 번성해왔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준 하나이 원장을 소록도의 성도들은 지금도 큰 은인으로 생각합니다. 하나이 원장이 얼마나 소록도 사람들을 사랑했던지 스스로 한센인이 되려고도 했고, 한센병 여인과 사랑에 빠진 적도 있다는 이야기가 여태 전해집니다. 그런 사연이 있기에, 1929년 하나이 원장이 소록도의 관사에서 숨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습니다.
1930년에 옛 자혜의원 건물 옆에 건립된 하나이 원장 창덕비(彰德碑)를 지날 때면 지금도 소록도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하나이 원장의 은덕과 그를 통해 소록도에 놀라운 일들을 행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묵상합니다.
우리 주님은 시대마다 소록도교회에 필요한 사람들을 보내시고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이 원장 이후에도 수많은 이들을 보내주셨고, 이들을 통하여 소록도교회는 아름다운 믿음을 키워나갈 수 있었고, 그렇게 자란 신앙이 소록도를 떠난 성도들이 전국의 새로운 정착촌으로 퍼져나가 세운 한센인 형제 교회들에게 그리고 소록도를 방문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하여 소록도교회는 우리 총회로부터 2019년에는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 제12호와 순교사적지 제3호로 지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역대 총회장님들과 여러 교회들이 방문해 서로 위로하고,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신앙훈련의 터전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 13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의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현재 소록도교회는 그처럼 감사하고 소중한 역사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관을 건축하는 중입니다. 그동안 소록도교회를 깊이 아끼고 여러 모로 협력해주신 총회와 전국교회 그리고 남녀전도회들이 다시 기도와 후원으로 동역해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또한 소록도교회처럼 여러분 각자의 삶에도 임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온 세상에 그리고 다음세대들에 전파하는 데 더욱 힘쓰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