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영환 교수
총회다음세대목회운동본부 전문위원
총신대학교 조직신학

메타버스 시대의 교회, 환상을 부수고 변혁을 일구라

개념정립도 안된 메타버스로 달려가는 교회, “조급하지 말고 신중하길”
디지털시대 살아갈 다음세대, 동화되지 않고 변혁시키는 신앙 길러줘야

라영환 교수·총회다음세대목회운동본부 전문위원·총신대학교 조직신학
라영환 교수·총회다음세대목회운동본부 전문위원·총신대학교 조직신학

사회 전반적으로 트렌드를 아는 것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트렌드를 잘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빠르게 이뤄지는 사회 변화에 잘 대처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렌드를 아는 것과 따라가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교회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 도태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트렌드를 따라가면 오히려 교회가 흔들릴 수 있다.

오늘날 변화와 변혁의 주체로서 교회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아니다. 시대마다 교회는 세상을 변혁하는 일을 감당해 왔다.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는 ‘변혁은 기독교 사명의 일부였으며, 기독교 공동체 초기부터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지난 2000년의 교회를 역사를 되돌아보면 트렌드를 따라갔던 교회는 무너져 버렸고, 그 시대를 변혁했던 교회는 결국 시대를 이끌어 나갔다.

메타버스, 너는 누구냐?

최근 가장 각광받는 사회 트렌드 중 하나는 메타버스다. 메타버스는 아직 개념도 구체화하지 않았다.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단어는 1992년 닐 스티븐슨(Neil Stephenson)의 소설 <스노우 크래쉬>(Snow Crash)에서 처음 사용됐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바타(avatar)라는 용어도 이 책에 등장한다. 이 책은 많은 IT 개발자들과 영화감독에게 영향을 주었다.

메타버스는 초월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세계를 의미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이다. 우리는 실제하는 물리적인 세계를 넘어선 것을 초물리적세계(meta-physical world)라고 말한다. 르네상스 이후로 사람들은 물리적 세계에 관심을 가졌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눈에 보이는 물리적 세계가 다가 아님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물리적 세계관이 한계에 도달하자, 초월적 세계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영적 세계, 초월적 세계에 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메타버스는 디지털 세계와 현실 세계가 합쳐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수업이 활성화되었는데 이것도 디지털 세계와 현실 세계가 합쳐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현실 세계를 디지털 환경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디지털 세계를 현실 환경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게임산업에서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메타버스는 문자와 같다. 사상이 없으면 문자는 발전하지 못한다. 셰익스피어 같은 작가가 나오고, 아이작 뉴턴 같은 과학자가 나오고, 루이스와 같은 사상가가 나오니까 영어라는 문자가 발전한 것이다. 사상 없는 문자는 감각을 표현하는 데 머물 수밖에 없다. 메타버스가 그렇다. 아직 사상이 정립되지 않았기에 감각에 머물 수밖에 없다.

메타버스, 수용인가 거부인가?

교회는 메타버스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거부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먼저 메타버스를 이해해야 하는데, 아직 개념조차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았다는 데 논의의 어려움이 있다. 문제는 개념 정의도 안됐는데, 교회가 너무 서두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메타버스가 가장 활발하게 논의되는 곳이 게임산업과 교회라고 한다. 뒤처짐의 경험이 교회를 조급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일단 우리는 메타버스에 대한 두 개의 극단적인 경향을 주의해야 한다. 하나의 극단은 메타버스가 현재 한국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의 대안이 될 수 있다며 적극 수용하자는 주장이다. 반대의 극단은 메타버스가 적그리스도이며 대 환난의 전조라고 보는 견해이다.

필자는 메타버스를 ‘666’이라고 보지 않는다. 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메타버스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수업과 공연 등 가상현실이 성큼 다가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온라인 공연과 가상현실은 다른 개념이다. 코로나19 때문에 드렸던 온라인 예배가 가상현실 예배는 아니다. 설교자 뒤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영상을 띄우는 것이 메타버스는 아니다. 그것은 디지털 기술과 관련된 것이다. 디지털 기술은 적절하게 사용하여야 한다. 온라인이나 디지털 플랫폼 기술을 사용하는 것과 메타버스는 분명 다르다.

메타버스, 무엇을 욕망하는가

사람들이 메타버스에 열광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할 수 없는 것을 현실처럼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학자들 가운데 Z세대가 메타버스에 열광하는 이유를 현실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암울함을 가상의 세계에서 풀 수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매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어 정의했다. 생존의 욕구, 안정의 욕구, 사회연결의 욕구, 존중의 욕구(자기표현), 그리고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4차 산업혁명 혹은 메타버스는 최상의 욕구인 자아실현을 충족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문제는 메타버스의 가상공간, 확장현실에서의 자아실현이 실제적인 자아실현은 아니라는 것이다. 양자의 괴리는 존재하고, 그럴수록 사람들은 확장현실에 빠져들 것이다. 확장현실은 판타지다. 마약과 같은 역할을 한다. 환상에서 깨어나면 다시 허무감에 휩싸일 것이다. 결국 확장현실은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Desiring the Kingdom)에서 인간을 욕망하는 존재로 보았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한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부터 지속적으로 교회가 강조한 것이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었다. 문제는 교회가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에게 소망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데 있다.

디지털 시대에 다니엘로 서기

다니엘이 살았던 바빌론의 왕궁은 화려하고, 최신 유행을 선도하고, 욕망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권력의 흐름이 보이고, 돈이 모이는 곳이었다. 선민의 자부심을 갖고 있던 유대인들은 발전한 바빌론을 보고 무너졌다.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론 문화를 받아들였다.

다니엘은 그러한 시대 속에서 믿음의 보전과 순결함을 유지할 수 있는지 이야기한다. 다니엘은 바빌론의 문화가 아닌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문화, 복음의 원리를 받아들였다. 다니엘이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빌론의 교육을 받기 전에 이미 율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어릴 적 신앙교육이 중요하다. 어렸을 적부터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대해 교육을 받아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신앙교육도 그렇다. 현실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보호가 아니라 살아내고 변화시킬 수 있는 역량을 증진시켜야 한다. 우리의 자녀가 디지털과 메타버스의 세상에서 살아갈 준비를 시켜야 한다. 현실에 대해서 생각하고 비판적으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닻을 내려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네이버나 구글처럼 직접적인 대답을 주지 않는다. 정보가 아니다. 지혜를 준다. 신앙교육도 그렇다. 정보가 아니라 지혜를 주어야 한다. 함께 이야기하고 생각해야 한다. 개혁주의 가정은 그렇게 했다. 함께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이게 하브루타(chavruta)이다. 성경 중심의 사고방식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거룩한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다니엘은 바빌론에 있었지만, 바빌론의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수 있었다. 동화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갔다.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 도전이 됐다. 그 이유는 바빌론 이전에 거룩한 습관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신앙교육도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어야 한다.

가정과 교회가 바벨론 같은 세상에서 문화적 분별력과 거룩한 습관을 기를 수 있는 학습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성경을 기준으로 비평적인 사고를 하고,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쳐야 한다. 지금 자녀들과 성도들은 가정과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미디어에서 답을 찾고 있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담은 콘텐츠를 만들고 다음세대와 성도들이 보도록 도와야 한다. 좋은 책을 소개하고, 부모교육과 결혼예비학교 직업소명학교 등 세미나와 강좌를 개설해야 한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처럼, 교회는 길을 보여주고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교회는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는 네트워크가 아니라 커뮤니티이다. 메타버스의 힘을 연결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 본질은 커넥션이 아니라 커뮤니온(Communion), 나눔이다. 성도의 교제는 성도의 나눔(sanctorum communio)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동체로 서로 짐을 지고, 친밀함을 경험해야 한다. 온라인은 오프라인을 통해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온라인은 효과적인 연결 수단이지만, 진짜 무엇인가 이루어지는 곳은 오프라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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