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신사참배 결의 80주년 (2)저항 그리고 회개

▲ 서울 흰돌교회가 총회 신사참배 결의 80주년을 맞아 주일예배 중 참회의 기도시간을 갖고 있다.

강경성결교회 주일학생 중심 거부운동, 전국적 영향 … 흰돌교회 회개운동 전개

▲1924년 충남 강경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강경의 상징 옥녀봉에는 일본 신사가 세워졌다. 자존심이 상한 강경 사람들에게 일제는 참배까지 강요했다. 특히 공립학교 교사와 학생들에게는 신사참배가 피할 수 없는 고역이었다.

부글부글 끓던 민심이 1924년 10월 11일 갑작스런 사건으로 폭발했다. 당초 강경소학교 학생들의 단체 신사참배가 예정되어있던 이날, 62명의 어린 학생들이 참배를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강경성결교회 주일학교에 다니는 중이었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직접 진상조사에 나서고, 주요 언론에 보도될 만큼 큰 관심을 일으켰다. 조사 결과 사건을 주도한 것은 강경성결교회를 섬기던 백신영 전도사와 소학교에 재직 중이던 김복희 교사로 밝혀졌다. 학생들은 퇴학당했고, 김 교사는 학교를 사직해야 했다.

이 사건은 이후 전국적인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번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하고 우리 민족에게 신사참배의 고삐를 한껏 죄어가던 일제의 정책은 이 사건 이후 크게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강경성결교회는 일제의 역사교육도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했고, 1943년에는 이헌영 목사가 천황심판론을 제기하여 옥고를 치르는 등 항일정신을 발휘한 대표적 교회로 명성을 떨쳤다.

▲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교회지도자들이 일제로부터 수난을 당한 현장인 구 의성경찰서.

▲1938년 경북 의성

의성경찰서가 붐비기 시작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경찰들은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1938년 6월에 의성읍교회 유재기 목사를 체포한 것을 전후해,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끌고 와 수감했다. 이른바 ‘의성농우회 사건’이었다.

농우회는 평양신학교 출신들이 각자의 고향이나 사역지에서 결성해 운영한 농촌계몽조직이었다. 농촌사회를 잘 살게 만들자는 취지의 협동조합 운동이었지만, 일제는 이를 조선인들의 민족운동 나아가 반일운동으로 인식하고 강력한 탄압을 자행했다.

더욱이 당시는 신사참배 문제로 한국교회와 일제의 힘겨루기가 최고조에 달하던 시점이었다. 신사참배 거부에 앞장선 인물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일제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의성경찰서에는 농우회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인물들까지 잡혀와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 중리교회의 권중하 전도사 등이 그렇게 핍박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의성농우회 사건을 빌미로 한 일제의 개신교 기세꺾기는 성공한 듯 보였다.

하지만 일제의 권세는 이후 10년을 채 넘기지 못했고, 순교자들의 이름은 길이 남았다. 핍박의 현장이었던 옛 의성경찰서는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로 지정돼, 순교신앙을 전수하는 산교육의 터전으로 변신하고 있다.

▲ 일본 신사가 있던 터 위에 세워진 고흥읍교회 석조예배당

▲1958년 전남 고흥

정규오 목사와 고흥읍교회 성도들은 드디어 120평짜리 석조예배당을 완공하며 기쁨에 젖었다. 더욱이 예배당이 세워진 터전은 일본 신사가 세워져있던 자리였다. 일제강점기 내내 겪었던 아픔과 치욕을 통째로 몰아낸 쾌거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해방 직후 전국의 신사들은 자진 철거되거나 한국인들에 의해 불살라졌다. 그 자리 일부는 교회들이 차지했다. 우리 땅에 세워진 신사들은 대체로 마을을 내려다보는 높은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고, 부지 또한 널찍했다. 예배당을 짓기에도 딱 적합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고흥읍교회가 신사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고흥읍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교회 구성원들이 삼일만세운동을 비롯해 국채보상운동, 물산장려운동 등 겨레의 자주권 회복에 앞장섰던 공동체였다.

특히 고흥읍교회가 소속되어있던 순천노회는 총회 결의 이후에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인물들이 1940년 ‘원탁회사건’으로 대거 체포되어 수난을 당할 만큼 굳센 신앙적 결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인 김정복 목사는 고흥읍교회 담임목사직을 거쳐 소록도교회에 부임한 후, 6·25 한국전쟁 당시 손양원 조상학 등 동료 노회원들과 나란히 순교의 길을 걷기도 했다.

▲ 강경성결교회에 세워진 신사참배 거부 선도비.

▲2018년 서울

제103회 총회 개회를 하루 앞둔 9월 9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소재 흰돌교회는 특별한 주일을 보냈다. 주일낮예배는 물론이고 주일학교 전 부서에 걸쳐 설교를 통해 신사참배의 역사를 가르치고, 한국교회가 범한 죄를 회개하는 기도 시간을 마련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튿날인 9월 10일에는 교회 전체에 하루 금식을 선포하여, 모든 성도들이 음식을 끊고 기도에 전념하도록 했다. 오창희 담임목사는 따로 사흘 동안 금식기도의 시간을 가졌으며, 교우들 전체가 한 주 동안 경건한 회개의 시간을 보냈다.

9월 10일은 바로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지 정확히 8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흰돌교회는 1970년에 설립되어 아직 50년도 지나지 않은 공동체이니 신사참배 문제와 직접 연관이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토록 철저한 참회의 시간을 보낸 것은 역사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필요하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에서 가슴을 치는 회개가 일어나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의 회개가 아니라 전 교단적, 전 교회적 회개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민족이 70년 만에 회복되는 은혜를 얻은 것처럼 우리도 교회가 새로워지고, 신사참배의 죄로 말미암아 황무해진 북한 땅에 70년 만에 다시금 교회가 서는 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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