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특별기획] 다시 세우는 2017 한국교회 신앙고백 2- ⑥ 오직 그리스도의 진리

중보자 그리스도는 단번에 구원의 의를 이루시고 성도에 전가하기 위해 지금도 중보 하신다

종교개혁을 통하여 삼위일체론, 기독론과 더불어 삼대 교리 중의 하나라고 불리는 이신칭의 교리가 체계적으로 수립되어 갔다. 루터는 본 교리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천명하면서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다. 칼빈은 다음 세 가지를 들어 이를 신학적으로 정리하였다. 첫째, 그리스도의 의 외에 다른 구원의 의는 없다. 둘째, 그리스도의 의는 값없이 전가(轉嫁)된다. 즉, 거저 성도의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나 <로마서 주석> 등 여러 곳에서 구원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설명하면서 그것이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음을 강조한다. 첫째, 구원의 근원적 동기는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 둘째,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 혹은 의가 구원의 유일한 질료 혹은 실체, 즉 값이 된다. 셋째, 구원의 유일한 도구는 믿음이다. 믿음은 도구일 뿐, 믿음 그 자체에는 어떤 공로도 없다. 넷째, 구원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다(행 16:31). 십자가 외에 다른 것으로 꾀는 것은 모두 불법이며 미혹이다(갈 3:1). 다른 복음은 없다(갈 1:7).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롬 10:17; 마 17:5).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값이 된다. 성도의 선택, 칭의, 성화, 영화의 전(全) 구원 과정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와 함께 모든 것을 주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는다(롬 10:3). 여기에 칼빈과 개혁신학자들이 개진한 언약신학의 핵심이 있다.

▲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형벌을 당하시고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뜻을 순종하셨다. 칼빈은 이를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중보자 그리스도가 단번에 영원히 구원의 모든 의를 이루시고 그 의를 성도에게 전가해 주시기 위하여 지금도 계속 중보하신다’고 복음의 핵심을 설명했다.

구속사적 성취: 단번에 영원히 구원의 의를 이룸

루터가 이신칭의를 기치로 삼아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면서 성도가 누리는 구원의 은혜 자체에 집중했다면, 칼빈은 그 은혜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중보자 그리스도가 단번에 영원히 구원의 모든 의를 이루시고 그 의를 성도에게 전가해 주시기 위하여 지금도 계속적으로 중보하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복음의 핵심을 간파하였다. 이로부터 개혁신학을 특징짓는 구속사적-구원론적 관점이 비롯되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안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의 구원을 위한 모든 의를 다 이루게 하셨다(롬 8:3; 엡 1:4; 요 19:30). 그 의는 모든 형벌을 당하신 순종(obedientia passiva, 受難 혹은 受罰)과 율법에 계시된 아버지의 모든 뜻을 행하신 순종(obedientia activa, 守法)을 포함한다. 그리하여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은혜에 모두 미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마 1:1).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레 17:11; 히 9:22).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새 생명을 얻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요 12:24).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 오신 주님이 “하나님의 큰 일”을(행 2:11) 다 이루셨다(요 19:30). 그 다 이루심은 구약의 언약과 절기와 제사에 모두 미친다.

성경에 280회 이상 나오는 모든 언약을 주님이 다 이루셨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등과 맺은 구약의 언약이 모두 성취되었다.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통하여 언약이 성취될 것을 믿었을 뿐, 그들에게 공로가 있어 그들의 후손이 복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십자가의 주님이 모든 언약을 다 이루셨으므로 그를 믿는 자마다 “피로 세운 새언약”의 은혜에 동참하게 되었다(고전 11:25). 주님이 유일한 대속의 “씨”로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값을 치르셨다. 이것이 “새언약”(히 8:8, 13; 9:15), “더 좋은 언약”(히 7:22; 8:6), 곧 신약의 복음이다.
주님은 또한 모든 절기를 다 이루셨다. 주님이 “우리의 유월절 양”(고전 5:7),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 36)이 되셨다. 주님은 또한 단번에 죽음을 죽이시는 죽음을 죽으셔서 영원한 오순절, 칠칠절, 맥추절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의 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맺혔다(고전 15:20). 뿐만 아니라 주님은 초막절의 장막이 되셨다. “성전보다 큰 이”가 자기 자신을 깨뜨려 우리가 영원히 거할 처소가 되셨다(마 12:6). 그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신의 육체를 찢어 모든 민족이 영원한 안식에 이를 수 있도록 “새로운 살 길”을 여셨다(히 10:20; 슥 14:16~21).

이렇듯 주님은 절기를 다 이루셨을 뿐만 아니라 제사를 또한 다 이루셨다. 절기의 중심에는 제사가 있었다. 유월절에는 죽음이 지나간 것을, 오순절과 수장절에는 생명을 얻은 것을 기념하는 제사를 드렸다(출 12:43~51; 레 23:1~44; 신 16:1~17). 구약의 제사장들은 짐승의 제물로 반복해서 제사를 드렸지만, 주님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아(엡 5:2; 갈 1:4; 딤전 2:6) “단번에”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히 9:12, 26, 28; 10:10; 롬 6:10; 벧전 3:18).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는 속죄제(贖罪祭)로, 허물을 가리는 속건제(贖愆祭)로, 감사로 되돌리는 감사제(感謝祭)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화목제(和睦祭)로 자기 자신을 드리셨다. 자기 자신 전부를 헌신제인 번제(燔祭)로 드리셨다. 허공에 달리셔서 거제(擧祭)로, 몸을 요동치시며 요제(搖祭)로, 살이 짓이겨져 소제(素祭)로, 물과 피를 다 쏟아 전제(奠祭)로 드리셨다(레 1:1~7:38).

구원론적 적용: 보혜사 성령의 임재

주님은 보혜사 성령에 대해서 상세히 가르쳐주셨다(요 14~16장). 보혜사 성령의 임재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자녀요 상속자로서 그가 이루신 모든 의를 누리게 된다(롬 8:17).

첫째, 보혜사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 “속에” 영원히 계신다(요 14:16~17; 마 28:20). “임마누엘”이신 주님이(마 1:23)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이다(갈 2:20; 골 1:27). 성령의 임재는 ‘단회적’, ‘절대적’, ‘인격적’이다. 성령은 두 번 임하시지 않고, 양적으로 임하시지 않고, 물질적으로 임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성령을 더 채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 내 안에 마음껏 사시도록 성경 읽고, 기도하고, 경건하게 살고, 회개하는 것이다(엡 5:18).

둘째, 보혜사 성령은 아버지가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다(요 14:26; 16:13; 요일 2:20, 27). 보혜사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증언”하신다(요 15:26).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을 알게 된다(요 14:20). “진리의 영”이 임하면 우리의 눈이 밝아져 주님 못 박히신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갈 3:1). 그리고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이실 뿐만 아니라 생명이 되심을 믿게 된다(요 14:6).

셋째, 보혜사 성령은 ‘능력의 영’이다. 이는 ‘은혜의 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성도에게는 은혜 외에는 어떤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유일한 능력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능력이다. 보혜사 성령을 양자의 영으로 받은 자는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주님이 친히 행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롬 8:15; 갈 4:6; 요 14:13~14). 성도의 순종은 오직 그의 “예”에 대하여 “아멘”하는 순종밖에 없다(고후 1:20).

이와 같이 보혜사 성령은 임마누엘 되시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영이시므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일컬어지신다(롬 8:9; 빌 1:19). 이러한 보혜사 성령의 세 가지 특성이 주님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가운데 하신 다음 말씀에 모두 나타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임마누엘의 영)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진리의 영)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능력의 영)”(요 15:7).

그리스도의 삼중직: 선지자, 제사장, 왕

중보자 그리스도는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 대속의 의를 다 이루셨다. 그 의를 우리의 것 삼아 주시기 위하여 지금도 그는 우리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중보하신다. 칼빈과 그를 잇는 개혁신학자들은 언약신학을 전개함에 있어서 이 점에 특히 주목하였다.

첫째,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이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모사”와(사 9:6; 28:29) “증인”이(사 55:4) 되셨다. 그가 “영원한 의”를 드러내셨다(단 9:24). 사람들에게 “큰 빛”이 비추어(사 9:2) 그들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요 4:25). 그는 곳곳에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셨다(마 4:23).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히 1:1~2).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3). 오직 그의 얼굴에만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있다(고후 4:6).

둘째,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다. 이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그랬듯이, 우리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시는 일과 기도를 드리시는 일을 포함한다. 주님은 자신을 제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다(요 17:19; 벧전 1:19; 히 7:26~27; 10:10~14).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마 20:28; 롬 5:8). 그가 우리의 “화목자”로 세움을 받았으며(롬 3:2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다(롬 5:10). 그가 “선한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죽임을 당하신 것은 죽음에 삼킴을 당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삼키시기 위함이셨다(요 1:29; 10:15; 롬 4:25; 벧전 3:22). 그리하여 죽기를 두려워하여 일생 동안 죽음에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 주시고자 하셨다(히 2:14~15). 그가 하늘에 있는 참 성소에서 그들을 위하여 지금도 간구하신다(히 7:24~25; 9:11~12).

셋째, 그리스도의 왕직이다. 교회가 영원하듯이 그리스도의 왕국도 영원하다(단 2:44; 눅 1:33; 엡 1:20~23). 그리스도의 통치는 단지 군림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주시는 것이다. 은혜의 선물을 부여하심이 다스리심이다(엡 4:7). 성령을 부어주시고, 성령의 은사를 내려주시고, 자신의 의로 우리를 채워주시고, 자신의 권능으로 우리를 능하게 하시고, 자신의 부요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심에(고후 8:9) 왕권이 있다.

▲ ●기고문병호 교수(총신대 신대원)

승천하신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셔서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서 친히 다스리신다(엡 1:20~22; 빌 2:9; 고전 15:27). 보혜사 성령을 내려주심이 주님의 통치방식이다. 그 영의 임재가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 영의 임재의 확산이 하나님의 나라의 확산이다. 전도와 선교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행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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