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 특별기획] 다시 세우는 2017 한국교회 신앙고백 2- ④ 오직 성경의 진리

‘오직 성경으로’는 종교개혁 근본사상 포괄 …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입술, 마음에 있다

종교개혁의 근본사상: 다섯 가지의 “오직”

종교개혁은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라는 구호에서 점화됐다. 하박국 2장 4절에서 인용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이 그 근간이 됐다. 이로써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이 공표됐다(히 11:6).

‘오직 믿음’은 교회의 전통이나 의식(儀式)이나 교황이나 사제의 어록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을 믿음’을 뜻했다. 성경이 “믿음의 말씀”으로 칭해졌다(롬 10:8; 딤전 4:6). 그리하여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구호가 뒤따랐다. 이로써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유일한 권위를 갖게 됐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에(롬 10:17), ‘오직 성경을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오직 그리스도로(solo Christo)’라는 구호가 뒤따랐다. 이로써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primatus, primacy)을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이 적그리스도로 정죄됐다.

‘오직 그리스도로’는 믿음의 대상이 그리스도라는 점에 그치지 않고, 오직 그의 대속의 공로로 우리가 구원에 이른다는 점을 필히 상기시킨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의(요 19:30)를 값없이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셔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며, 영화롭게 된다(롬 8:30).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로 “많은 사람”이 새 생명을 얻게 된다(롬 5:15). 그리하여 ‘오직 은혜로(sola gratia)’라는 구호가 뒤따랐다. 이로써 중세를 지배했던 신인합력설(神人合力說, synergism)이 거부되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에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을 찬미하는 송축과 송영이 마땅히 수반된다(롬 4:6).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모든 대속의 의를 이루게 하시고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은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다(엡 1:6).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이란 구호가 뒤따랐다. 이로써 천사들이나 성인들이나 마리아가 숭앙이나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이 확정됐다.

이상 다섯 가지 구호는 종교개혁의 근본 사상을 대변한다. 각각은 고유한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중 ‘오직 성경으로’가 전체를 포괄한다. 나머지 네 가지 역시 조목조목 성경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 <95개조 논제>로 루터는 보름스제국의회에서 파문을 당했다.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위험에 처한 루터를 보호하기 위해 납치로 위장해서 바르트부르크성에 지내도록 했다. 이 성에서 루터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다. 루터가 성경을 번역했던 서재와 책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 루터 칼빈 녹스의 맥

종교개혁은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기치로 내세웠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성경의 진리를 백일하에 천명한 것이었다(창 15:6; 합 2:4; 요 3:16; 행 16:31; 롬 1:7; 3:21~24; 빌 3:9).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리스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아들이 되신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대속의 모든 의를 다 이루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그 의를 전가해 주심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시는 구주가 되심을 계시한다(딤전 2:5; 고후 5:21; 요 20:3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다르지 않다(막 1:1). 그리스도가 신구약 모든 성경의 실체이시다. 구약은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고(요 1:45), 신약은 오신 그리스도를 선포한다(눅 2:11). 성경이 총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른 복음”은 없다(갈 1:7). 루터는 이를 구원의 유일한 원리로서 천명했고, 칼빈은 이로써 언약신학을 구축하여 개혁신학의 체계를 세웠으며, 녹스는 이를 교회정치에 적용하여 장로교를 형성하였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중세 로마 가톨릭의 사제중보주의가 비성경적이며 이교적인 공로주의와 의식주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간파했다. 만약 사람이 자기의 공로로 스스로 죄의 값을 치를 수 있다고 친다면, 그리하여 면죄부에 여하한 효력이라도 있다고 여긴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고난도 죽으심도 부활도 모두 헛될 것이며, 그의 몸 된 교회 역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동시대를 향하여 엄중히 포고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성경 번역과 주석과 가르침을 통하여 얻게 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신구약의 시대적 경륜은 다양하나 실체는 그리스도로서 하나라는 사실에 기초해서 자신의 언약신학을 전개했다.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은 서로 구별되나 분리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세대주의적 발상은 그릇되다. 율법은 언약의 법 곧 토라로서 명령과 함께 약속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약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복된 소식이 복음이다. 복음은 율법의 폐지가 아니라 완성으로서, 그 “마침”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계시한다(롬 10:4; 참조. 마 5:17). 성경이 전하는 유일한 영생의 도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이는 신약과 구약이 다를 바 없다. 다만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었다는 점에 있어서 그 경륜이 아직 아동기와 같았다. 칼빈은 성경의 전체 가르침이 하나의 교리체계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대작 <기독교 강요>에서 교리사상(敎理史上) 처음으로 성경론 혹은 계시론을 신학의 서론(prolegomena)으로서 다루었다. 그는 여기에서 신학(theologia)은 하나님(theo)의 말씀(logia)을 떠나서는 수행될 수 없다는 점에 확고하게 착념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이끌어 장로교의 산파역할을 했던 녹스(John Knox, 1514~1572)는 성경을 최고의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교회를 뿌리에서부터 전면적으로 개혁했다는 점에 있어서 ‘청교도주의의 설립자’라고 칭해진다. 우리는 녹스가 ‘성경의 사람’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제네바에서 공부할 때 그곳에 체류하는 영국인들의 모임을 이끌며 ‘제네바 성경(Geneva Bible)’이라고 불리는 영어성경을 편찬했다.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은 양식 있는 설교 사역이었으며, 그의 꿈은 칼빈의 신학에 기초해서 스코틀랜드를 언약국가로 세우는데 있었다. 그가 기초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에 뚜렷이 나타나듯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무오한 말씀인 성경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따른 무조건적인 선택이 그의 사상의 두 축이 됐다.

말씀과 성령: 성경의 권위와 성령영감

종교개혁은 초대교회를 지향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인종과 국경과 신분을 초월하여 말씀을 듣는 예배를 드리고, 말씀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도드리며, 말씀대로 살고 죽는, 말씀을 땅 끝까지 전하는 삶을 지상명제로 삼았다. 사람의 교만을 꺾기 위하여 바벨에서 말씀을 흩으셨던(창 11:6~7) 하나님이 그 만국의 언어로 자신의 “큰 일”이 선포되게 하셨다(행 2:11). 만인제사장주의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앞에는 공로도 자질도 무색하였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의 영감(靈感)으로 기록되어 성령으로 조명(照明)되고 감화(感化)된 심령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지는-수납(受納)되는-거룩한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autoritas, authority)는 그 저자(autor, author)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서부터 비롯된다. 성경의 원저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인간 저자들을 감동시켜 기록하게 하셨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딤후 3:16). 이는 ‘성령의 호흡을 불어넣으심(in-spiration)’ 곧 ‘영감(inspiration)’을 뜻한다. 성령의 영감은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 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와 기록할 때 모두 일어난다. 이를 각각 계시구술(啓示口述)과 계시기록(啓示記錄)의 영감이라고 부른다. 성령의 영감은 성경 전부에 미친다. 선포되는 사상이나 규범이나 교훈과 함께 문장과 어절(語節)과 자구(字句)에도 미친다. 그것은 규범과 역사에 모두 미친다. 성경의 말씀 각각은 그 자체로 역사성을 지닌다. 성경의 성령 영감은 전체적(plenary)이고 축자적(逐字的, verbal)이므로 성경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무오(無誤)하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에 계층을 두거나 성경 일부를 부인하거나, 폐기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과 같이 외경(外經, Apocrypha, 토빗, 유딧, 마카베 상, 마카베 하, 솔로몬의 지혜, 시락 혹은 집회서, 바룩)을 “이차적 정경”이라고 해서 받아들이는 것도 거부한다.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신앙고백서, 1.2-3)에 나타나듯이, 우리는 신구약 66권만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외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므로 아무 신적 권위도 없는 여느 인생의 글과 다를 바 없이 여겨야 하며 그 이상으로 달리 사용해서도 안 된다.

성도가 타고 있는 말씀의 배는 오직 성령의 방향타(方向舵)로만 움직인다. 성령의 통치로 말미암아 성경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성도에게 작용한다. 성경은 인생의 책이 아니므로 인간의 이성으로 읽어낼 수 없다. 성경은 살아계셔서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리하여 살아있는 말씀이므로, 오직 은혜의 선물로 부여되는 믿음을 통해서만 계시로 받아들여진다(엡 2:8; 3:7).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름 아닌 성령의 언어적 감화에 순종하는 것이다(롬 1:5). 그 감화를 거부하는 자는 끝내 멸망에 이른다(벧후 3:16).

▲ ●기고
문병호 교수
(총신 신대원)

그 말씀이 우리 밖에 멀리 있지 않고, 우리 입술에, 우리 마음에 있다(롬 10:8-10; 신 30:11-14). 종교개혁자들은 이 진리를 신학과 신앙과 삶의 첫 번째 원리로 삼았다. 베드로의 후예를 자처하며 그 인적계승을 외치던 교황이 아니라 베드로가 의지했던 주님의 말씀에 유일한 신적 권위가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확신했던 것이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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