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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악한 중세 지나면서도 굳건히 개혁신앙 지켰다[종교개혁 500주년 특별기획] 다시 세우는 2017 한국교회 신앙고백2- ① 1000년 동안 핍박당한 진리

정통과 이단이 뒤바뀐 시대 … 개혁신학 바탕 ‘왈도파’, ‘가톨릭은 거짓’ 클라우디오 이단으로 정죄당해
 

종교개혁 500주년 특별기획 제1장 5편의 글을 통해 개혁의 여명기부터 20세기 개혁신학의 흐름을 개괄했다. 또한 주요 종교개혁자들의 사역을 살펴보고, 그 사역들이 교회는 물론 사회 각 분야에 영향을 미쳤고 세계사를 변화시켰음을 확인했다.
특히 1장에서 역사는 루터의 <95개조 논제>를 종교개혁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지만, 진리를 추구했던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의 흐름은 ‘한 지점과 한 인물’을 넘어선다는 것도 확인했다. 종교개혁 특별기획 제2장은 종교개혁자들이 외친 ‘진리’의 내용에 대해 고찰한다.
총 10편의 글을 총신대학교 라은성 교수(역사신학)와 문병호 교수(조직신학)가 기고한다. 1~2편은 라은성 교수가 1517년 이전 개혁신앙이 어떻게 명맥을 이어왔는지 설명한다. 3~10편은 문병호 교수가 2000년 동안 맑은 샘물처럼 흘러온 ‘진리’의 내용을 설명한다. <편집자 주>


종교개혁 500년주년을 맞이하면서 슬픈 것은 개혁신앙인(장로교인) 조차도 루터파 종교개혁과 개혁파 종교개혁을 헷갈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종교개혁 답사를 하더라도 독일 지역에만 치중하고 프랑스와 스위스는 대강 훑어보는 정도이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개혁파 종교개혁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두 종교개혁은 신학의 측면뿐 아니라 역사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나타낸다. 단적으로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가 성찬론에 대해 ‘기념설’ 또는 ‘상징설’을 주장할 때 어디서 그 사상을 가져왔을까? 칼빈에게 제네바에서 함께 목회하자고 제안한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은 어떻게 개혁신학을 가지게 되었을까? 1535년 6월 3일 프랑스어 성경 <올리베땅 성경>(Olivétan Bible)을 번역한 올리베땅(Pierre Robert Olivétan, 약 1506~1538)은 어떤 사상으로, 어디에서 목회했는가? 독일어 신약성경을 번역하기 전에 루터는 독일어로 된 <TEPL Bible>을 사용했는데, 이 성경은 누가 번역해서 사용했을까?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됐고,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가 태동했다. 그렇다면 1517년까지 무려 1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순전하게 정통신앙을 지키며 살았던 자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진리를 수호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매우 중요하다. 종교개혁을 ‘교회의 분열’로 여기는 가톨릭의 생각과 달리, 진리는 역사와 별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 루터는 <95개조 논제>를 발표한 후 보름스 제국회의에 소환돼 자신의 사상을 변호했다. 그 역사의 현장인 보름스에 루터광장이 조성됐고, 루터를 중심으로 4명의 종교개혁자들의 동상을 세워놓았다.

개혁신학의 계승자, 왈도파

앞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 곧 루터의 종교개혁과 차이를 가진 개혁파 종교개혁은 그 바탕이 ‘왈도파‘이다. 칼빈주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까지 이르지만, 그 중간 과정에 왈도파가 있다.

스위스에서 개혁신학을 한 자들은 대체적으로 왈도파에 속했다. 칼빈에게 영향을 준 사촌 올리베땅이나 파렐도 왈도파 소속 목회자였다. 이들이 번역한 프랑스어 성경을 프랑스만 아니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종교개혁자들도 사용했다. <올리베땅 성경>은 루터에게 신약성경 번역에 큰 도전을 주었다. 심지어 츠빙글리의 성찬론 역시 왈도파가 고수한 기념설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는 왈도파에 대한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만남에 참석하기도 했다. 개혁신학의 뿌리를 논할 때 왈도파를 빼놓을 수 없다.

로마 가톨릭은 왈도파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오늘날 왈도파의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로마 가톨릭이 왈도파를 종교재판소에 회부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단 판결문 속에서 왈도파의 존재와 정체가 드러났다. 그들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역사의 문헌은 항상 힘 있는 자들에 의해 기록되기 때문이다. 왈도파는 험악한 중세시대를 지나면서도 굳건하게 개혁신앙을 지켰다.
만약 왈도파가 갑자기 생겨난 자들이라면, 로마 가톨릭의 주장처럼 이단으로 규정될 가능성이 높다. 왈도파 이전에 개혁신학의 뿌리를 누구일까? 8세기 로마 가톨릭교회가 만들어지기 전, 순전하게 신앙을 지켜온 자들이 있었다.

정통과 이단이 뒤바뀐 시대

▲ 그들은 체코의 얀 후스, 이탈리아의 사보나롤라, 영국의 위클리프 그리고 프랑스의 왈도파 창시자 페트뤼스 발데스 다. 발데스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개혁주의 신학 특히 장로교회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기독교는 로마 황제 네로가 64년부터 기독교인들을 사자의 먹이가 되게 하고 화형을 시킨 이래 250년 동안 핍박과 순교를 당했다. 312년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핍박이 그쳤고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정통신앙에 대한 핍박은 훨씬 오래 지속됐다. 325년 제1차 범종교회의를 니케아에서 개최했음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누스는 정통신앙을 배제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세 명과 사생아들이 제국을 4등분하여 다스릴 때, 이단 사상인 아리오스주의가 정통 니케아신앙보다 훨씬 세력을 얻었다. 그의 아들 중 콘스탄티우스 2세(350~361년)가 제국을 통일하고 그의 조카인 배교자 율리아누스(361~363년)에게 제국을 넘겨줄 때도 역시 반삼위일체론인 아리오스주의를 여전히 지지하고 따랐다. 그 이후 황제가 된 요비아누스(363~364년)와 발렌티니아누스 1세(364~375년) 역시 아리오스주의자였다. 이후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 1세(379~392년; 392~395년)에 이르러 381년 2차 범종교회의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개최되면서 마침내 정통 니케아신앙이 재확언되었다.

바른 신앙은 여전히 핍박을 받았다. 반삼위일체론자인 아리오스파는 제국을 등에 업고 여전히 정통신앙인들을 핍박했다. 이 핍박을 피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은자생활을 하는 길이었고, 두 번째는 로마 제국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장소에서 신앙을 지키는 것이었다.

클라우디오 “가톨릭은 거짓교회”

이탈리아 북서쪽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피에몬테(Piemonte)에서 정통신앙을 고수한 이들이 있다. 사람들을 이끌었던 지도자는 클라우디오 데 토리노(Caludio I de Torino, 약 871년 사망)이다. 그는 스페인 출신으로 프랑스 아끼뗀느 왕 루이(778~840년)의 궁정 신부며 성경학교 교사였다. 황제 샤를마뉴가 814년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루이가 황제로 있을 당시 816년 창세기, 마태복음,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및 빌립보서 주석을 썼다.

클라우디오는 817년 토리노에 감독으로 임명받아 로마를 방문했을 때, 타락해 가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말씀 중심보다는 미신에 사로잡히고, 복음과는 상관없는 우상들을 섬기고, 스스로 베드로 후계자라고 억지 주장하는 것을 비판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를 거짓교회”라고 맹공격했다. 클라우디오는 <변증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로마 가톨릭교회)은 진리에서 떠났으며, 허무한 것을 찾으며, 그리고 무의미한 것에 안주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고 있으며 그분을 다시 욕보이고 있다. 그들은 사탄의 협력자들로 영혼들을 훔치고 있다. 불경건한 모양들에서부터 멀리 하지 않으면 창조주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고 영원한 저주를 직면할 것이다.”

▲ 라은성 교수
(총신대)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는 클라우디오를 이단자로 정죄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떤 종파를 전파한 것이 아니고 교회의 단일성을 고수하고 진실성을 설명했을 뿐이다. 나는 종파와 분파를 제거하고 이단들과 미신들을 진멸하려고 했다. 나는 그것들과 싸웠을 뿐만 아니라 전투를 벌였다…왜 당신은 스스로 굴복하여 어리석은 형상들 앞에 엎드리는가? 지상의 헛된 모양들과 형상들 앞에 노예처럼 몸을 숙이는가? 얼굴을 들어 하나님께 향하시기 바란다. 그분을 찾으면 아래 것에 대한 미련을 잊을 것이다.”

클라우디오를 보면서 개혁신학의 뿌리가 얼마나 고상하고 외롭고 힘들었는지 상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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