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대 교수(총신대)

‘여선지자’ 미리암의 공격적 역할에 부정적 입장 가졌다

박형대 교수(총신대)
박형대 교수(총신대)

신구약 성경의 여성사역자에 대한 개혁신학의 입장을 살펴보기 위해 관계된 자료를 살폈다. ‘신구약 성경의 여성사역자에 대한 개혁신학의 입장’에 대한 최근 논의를 보여주는 글들을 통해 학계의 동향을 살펴보고, 연구의 방향을 정하고자 한다. 

1. 학계의 동향

우선 에쉘만(Nathan Eshelman)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을 위해 모인 의원들이 ‘과부-집사(widow-deacon)’에 대해 어떤 의견이었는지, 뵈뵈(롬 16:1~2)가 ‘과부-집사’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어떤 결론에 도달했는지 정리했다. 1643년 12월 29일부터 1644년 1월 1일까지 이뤄진 이 논의에서, 우선, ‘과부-집사가 집사직에 포함될 수 있는가’에 대해 웨스트민스터 의회(the Westminster Assembly)는 “한 표 차이로(by one vote)”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어 에쉘만은 ‘과부-집사가 집사직에 포함된다’라고 한 웨스트민스터 의회 결정의 의미를 논했다. 그에 따르면, 웨스트민스터 의회는 ‘과부-집사’를 ‘권위(authority)를 가진 임직자’라기보다는 ‘기능직’(an office of function)으로 보았고, “집사라는 이름 아래에 포함된 채로(included under the name deacon)” 안수를 받더라도 “단지 그 직에 엄격히 제한된 안수(a solemn ordination—to that office—and that office alone)”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에쉘만은 뵈뵈가 ‘과부-집사’에 해당하는가를 다루는 의안은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 부결되었다고 전한다. 결국 디모데전서 5장에서 발견되는 ‘과부-집사’ 규정은 성경에서 실제적인 예를 찾지 못해 실효성을 상실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의회의 이러한 결정의 중요한 배경의 하나로, 에쉘만은 ‘칼빈 전통’을 든다. 칼빈은 이전 전통을 따라 ‘여성은 구제 사역만 가능’하다고 보았고, 집사에는 ‘권위 있는 집사(the authoritative deacon)’ 및 ‘기능적인 집사(the functioning deacon)’,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보았다. 더구나 칼빈 당시 제네바 교회에서 ‘기능적인 집사’인 ‘과부’는 ‘목사, 박사(교사), 장로, 집사’ 혹은 ‘목자, 장로, 박사, 집사’라고 하는 ‘네 가지 교회 임직’ 가운데 가장 낮은 ‘집사’의 종(the servants of the deacons)으로 요양사(hospitalier)나 구호인(relievers)에 해당되었다.

이로 볼 때 웨스트민스터 의회가 ‘과부-집사’를 ‘기능적인 집사’로 ‘권위적인 집사의 도우미’ 정도로 생각한 데에는 칼빈 전통의 영향이 컸다. 이 점에서 이정숙이 칼빈이 제시한 교회의 사중직을 근거로 한국교회의 권사 제도를 비판한 것은 재고가 필요해 보인다. 칼빈이 여성 사역자 특별히 디모데전서 5장에 있는 ‘과부-집사’를 ‘집사를 돕는 도우미’ 정도로 생각한 것을 모르고, ‘권사 제도’가 있는 한국교회가 칼빈이 제시한 교회의 사중직 견지에서 판단할 때 지나치게 수직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칼빈 전통을 고려하면, 한국교회의 ‘권사’는 본래 칼빈이 제시한 ‘과부-집사’직과 비교할 때, ‘책임’과 ‘권위’ 견지에서 훨씬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이정숙은 권사가 ‘교회 생활 가운데 사소한 것들, 이를테면 안내, 봉헌 및 계수, 음식 준비, 청소, 주차와 같은 교회 안팎의 다양한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데, 사실 이와 같은 업무는 칼빈 전통에서 ‘과부-집사가 맡아야 한다고 여긴 역할’과 겹치기도 하고, 동시에 더 ‘책임 있고 권위적인 역할’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칼빈이 생각한 ‘과부-집사’의 일은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돌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볼 때 이정숙이 권사의 역할이라고 제시한 ‘음식 준비, 청소, 주차’는 칼빈 전통에서 ‘과부-집사의 본래 업무’와 연결될 수 있고, ‘안내, 봉헌 및 계수’는 칼빈 전통의 ‘과부-집사’가 맡을 수 없었던 직무였다.

지금까지 여성 사역자에 대한 소논문을 살펴보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집중한 에쉘만의 논문을 통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담긴 여성 사역자에 대한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였다. 

둘째, 칼빈의 신학에 기초하여 한국교회의 ‘권사 제도’를 비판한 이정숙의 논문과 관련해서는 그의 비판이 재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셋째, ‘집사 단어군’의 용례 연구를 통해 로마서 16장 1~2절에 등장한 뵈뵈의 역할에 대해 제시한 아간의 글을 통해서는 여성 사역자 문제해결을 위해 성경학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발견한다. 

마지막으로 20세기 후반 사회현상이 여성 사역자에 대한 제도 및 칼빈주의에 미친 영향을 다룬 무튼과 호튼의 글을 통해 현재 여성사역자에 대한 전혀 다른 입장과 현상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2. 신구약 성경에 소개된 여성 사역자에 대한 칼빈의 입장

이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여성 사역자에 대한 부분의 근간이 된 칼빈이 신구약 성경에 소개된 여성 사역자들에 대해 어떻게 평가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답해야 할 질문은 ‘누가 신구약 성경에 소개된 여성 사역자인가?’이다. 다음으로 답할 질문은 ‘칼빈은 이 여성 사역자들을 어떻게 보았는가?’이다.

1) 신구약 성경에 소개된 여성 사역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에 소개된 직임으로 ‘선지직’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에 함께 소개된 여성 사역자로는 ‘여선지자’라 불리는 이들을 고려하면 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여선지자’로 불리는 사람은 미리암(출 15:20), 드보라(삿 4:4), 훌다(왕하 22:14; 대하 34:22), 이사야의 아내(사 8:3), 노아댜(느 6:14)이다. 신약성경에서 ‘여선지자’로 불리는 사람은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눅 2:36)와 두아디라 교회의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계 2:20)이다. 이들 가운데 느헤미야서에 나오는 노아댜(6:14)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두아디라 교회의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2:20)은 칼빈 저작인 <기독교강요>와 그의 주석 시리즈에 나오지 않는다.

2) 신구약 성경에 소개된 여성 사역자에 대한 칼빈의 입장
구약성경에서 ‘여선지자’로 불리는 ‘미리암, 드보라, 훌다, 이사야의 아내’ 가운데 칼빈 저작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은 미리암이다. 미리암에 대한 칼빈의 평가를 먼저 살펴본다.

여선지자라 불리는 미리암에 대해 칼빈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이다. 출애굽기 15장 20절을 주해하면서, 미리암이 “가르침을 위한 공식적인 직무(the office of public teaching)”를 가졌다고 스스로 간주한 것으로 모세가 기록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단지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지도적인 역할을 한 것(the leader and directress of the others in praising God)으로 모세가 기술했다는 것이다.

신명기 24장 8절 “너는 나병에 대하여 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에게 가르치는 대로 네가 힘써 다 지켜 행하되 너희는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지켜 행하라”를 주석하면서, 미리암이 나병에 걸리게 된 것은 “사람들이 죄를 통해 미리암과 같은 악을 자신들에게 가져오지 않게 하기 위함(lest, through sin, they should bring upon themsleves the same evil as Miriam)”이 아니라, “미리암이 진영으로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영원한 법으로써 강제성과 무게를 갖도록 하기 위함(God’s command, whereby He prohibited Miriam from entering the camp, was to have the force and weight of a perpetual law)”이라고 한다. 

분명 민수기 12장 14절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의 아버지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지라도 그가 이레 동안 부끄러워하지 않겠느냐 그런즉 그를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가두고 그 후에 들어오게 할지니라 하시니”라고 하여, 일주일이 지나면 미리암에 진영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말씀하셨음에도, 칼빈은 미리암은 영원히 진영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다.

민수기 12장 1절에서 미리암의 이름이 아론보다 앞선 것을 설명하면서, 미리암의 잘못을 ‘여성의 특성’과 연결 짓는다. 미리암이 아론을 설득했고 다툼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성의 야망은 대단하다(the ambition of the female sex is wonderful). 또한 종종 남성보다 더 괄괄한 여성들은 사소한 말다툼뿐 아니라 강력한 전쟁의 선동자들이 되곤 한다(and often have women, more high-spirited than men, been the instigators not merely of squabbles, but of mighty wars)”고 말한다. 이러한 칼빈의 표현은 필로가 <창세기에 대한 질문과 대답> 5권 15절에서 “또한 여성은 불합리하고, 짐승 같은 열정과 두려움과 슬픔과 즐거움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로부터 치료할 수 없는 결점과 형언할 수 없는 질병이 생겨난다” 라고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한다. 현대인들이 보면 ‘성차별적’이라고 할 수 있는 표현을 (비록 필로처럼 신랄하지는 않지만) 미리암과 관련하여 칼빈이 덧붙인 것이다.

3) 요약
이상으로 신구약 성경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여선지자’를 칼빈이 어떻게 평가하고 소개했는지 살펴보았다. 미리암의 경우는 매우 부정적인 인물로 소개된다. 미리암의 부정적인 모습이 여성의 전반적인 특징으로 그려지기도 하였다. 드보라와 훌다의 경우, 미리암처럼 부정적으로 소개되지는 않지만, 결국에는 별반 차이 없는 인물로 귀결된다. 반면, 이사야의 아내는 특별히 수행한 사역이 없지만 인정받는다. 안나도 칭찬은 받지만, 예수님을 소개하는 그의 예언 사역보다는 ‘경건 훈련’이 부각된다. 안나가 과부로서 좋은 모범을 보였지만, 디모데전서 5장의 ‘과부’가 안나와 같은 기도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칼빈 저작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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