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원 교수(총신대신대원)

강도권은 차별의 문제 아닌 목사에게 주어진 고유 권한

교단의 오랜 이슈 가운데 하나가 여성사역자 지위 향상에 대한 부분이다. 교단은 특별위원회로 여성사역자지위향상위원회를 구성해 여성사역자의 역량 강화를 위한 제도적, 환경적 개선책을 고민했다. 이와 관련 교단의 전문가들로부터 여성강도권이 성경적으로 타당한가에 대한 기고를 받는다. 여성강도권 부여와 향후 여성사역 발전의 방향을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정승원 교수(총신대신대원)
정승원 교수(총신대신대원)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해졌고 성도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고대하고 있지만 처음 창조질서는 여전하다. 즉 타락에도 불구하고 암수 혹은 남녀를 통한 생육과 번성은 계속되었고 여전히 하늘의 별들은 5000년 전과 같이 운행하고 있다.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인간은 가정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여러 관계와 질서를 세웠다. 또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창조 당시 받았던 하나님의 형상은 불신자 신자를 막론하고 여전히 남아있다.(창 9:6; 약 3:9) 구속질서와 창조질서는 구속주와 창조주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분리될 수 없다. 구속으로 말미암아 처음 창조질서가 취소되거나 무의미하게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유의미하게 되었고 본질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바빙크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창조의 본질을 변질시킨 것이 아니라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바빙크는 전적타락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본질적인 구성 요소들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설명한다.

“현재 존재하는 모든 본질적인 구성 요소들은 타락 전에도 존재했다.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들, 형제와 자매, 친척과 친구의 구별과 차이, 그리고 결혼, 가정, 양육 등과 같은 사회적 생활의 여러 기관들과 관계들…, 이것들은 틀림없이 죄로 인해 바뀌어 그 형태가 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리와 토대는 죄가 아니라 창조, 하나님의 제정에 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지만 창조질서, 특히 남자와 여자의 구별과 차이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6)는 말씀에서 남자와 여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는 이미 창조 당시 하나였다. 이 말씀은 차별 없이 모두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지 구속질서로 말미암아 창조 당시 주어진 남녀의 구별이 없어지고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 바뀌었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강도권은 목사의 고유 권한이다. 성경은 오직 남자에게 목사의 자격을 부여한다. 디모데전서 3장 2~5절을 보면 감독(목사 및 장로)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라고 말씀하고 “사람(남자)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말씀한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는 것’과 ‘남자가 자기 집을 다스리는 것’은 창조질서에 속한 사안들이다.

교회에서 여성의 목사(장로) 안수 문제는 창조질서와 부부질서와 연계되는 문제이다. 남편이 가정의 가장인 것처럼 남자가 교회 가장으로 목사와 장로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이것은 주도권 다툼도 아니요 여성을 차별하는 것도 아니요 남자가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각자 주어진 역할을 통하여 질서를 지키고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따르는 차원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성령의 교통으로 이루어진 언약 공동체이며 영적 가족집단이다. 성경 여러 곳에서 교회를 가족 차원에서 말씀한다.(고전 7:15~17; 11:7~16; 고후 12:13~14; 엡 5:22~33; 딤전 3:5; 5:16~17; 약 5:14; 벧전 5:1~14; 요삼 1:1~10 참조) 특히 디모데전서 3장 5절,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말씀에서 집과 교회를 직접적으로 연계한다.

많은 논쟁이 되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 33~36절과 디모데전서 2장 11~15절은 엄밀한 의미에서 여성 안수를 금하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 강도권을 금하는 말씀이다. 여성 안수 불가결은 그에 따른 귀결이다. 한편 고린도전서 11장 5절,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말씀은 남녀 동등주의(egalitarianism) 입장의 대부분 복음주의 학자들뿐만 아니라 상호보완주의(complementarianism) 입장의 많은 개혁주의 학자들도 바울이 여성에게 기도와 예언을 공예배에서 허락하신 것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잠잠하라”(고전 14:34)는 명령과 “조용할지니라”(딤전 2:12)는 명령은 여성들에게 교회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보기 힘들다. 위 두 구절에 관한 특별한 상황 혹은 배경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위 두 구절은 그 당시 상황을 반영한 것뿐 오늘날 교회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특수한 상황에 따른 명령과 지시라고 해도 그 명령과 지시의 의미는 오늘날 교회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항구적 가르침이다.

고린도전서 14장 33~36절을 주석하면서 카슨(D. A. Carson)은 이것은 여성들로 가르치는 것, 예언하는 것, 기도하는 것 등을 금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방언을 통역하거나 예언을 분별하는 것을 금하신 것으로 해석한다.(고전 14:27, 29 참조) 통역과 분별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속한 고유 권한으로 계시적 차원의 은사 혹은 사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로 카슨은 36절,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라는 말씀을 언급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비단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도 해당된다고 한다.

이 구절에 관하여 파이퍼(John Piper)와 그루뎀(Wayne Grudem)은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아니라 교회의 질서에 반한 일 때문에, 즉 남자의 가르치는 권한을 해치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바울이 해당 여성들에게 이러한 지침을 줬다고 주장한다. 디모데전서 2장 13절에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이후며”라는 창조질서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또한 더글라스 무(Douglas Moo)는 디모데전서 212절에 남자를 주관하는 것에서 주관은 부정적 의미로 군림하다는 엑수시아조(εξουσιάζω)가 아니라 주도하다는 의미의 아우덴테오(αθεντω)라며 여성들은 남성들을 절대로 주관하지 못한다는 의미, 즉 하나님이나 그의 말씀을 주관하지 못한다는 차원의 절대적 의미가 아니라 장로(목사) 위에 서서 주관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12절의 한글 번역은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되어있다. 가르치는 것에 대한 목적어 없이 가르치는 것 자체를 금하는 것처럼 번역했다. 그러나 원어를 보면 οκ οδ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영어로 “neither nor”, 즉 한글로 이나 또한으로 번역해야 한다. 그리고 가르친다는 디다스케인(διδσκειν)주관하다는 아우덴테인(αθεντεν), 둘 다 부정형(infinitive)으로 되어있다. 이 부정형 동사의 목적어는 소유격으로 표시된다. 따라서 주관하다의 목적어는 소유격 단어인 안드로스(ἀνδρς, 남자)이며 이것은 주관하다만 아니라 가르치다의 목적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가르치는 것 자체를 금한 것이 아니라 남자를 가르치는 것을 금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창조질서는 결코 한 쪽을 무시하거나 낮추지 않는다. “사람[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2:18) 말씀하셨다. 여기 돕는 배필이라는 한글 번역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히브리어 에제르(עֵ֖זֶר)는 한글 번역처럼 형용사가 아니라 명사형으로 도움혹은 돕는 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배필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 케네게도(כְּנֶגְדּֽוֹ)는 한글 번역처럼 명사가 아니라 그에게 알맞은이라는 전치사구이다. 아내란 남편을 돕는 비서라는 뜻이 아니라 아내는 남자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차원의 돕는 자라는 말씀이다. 남편이 집을 다스리는 가장이라고 해서 결코 남편이 아내보다 높다는 뜻이 아니다. 서로 주어진 역할이 다를 뿐이다. 교회에서도 목사가 다른 평신도보다 높은 위치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도권은 목사에게만 주어진 고유 권한이다. 목사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강도권에서 발견된다.

한편 사도행전에 여성 사역자들의 역할이 나타난다. 사도행전 8장 3절을 보면 바울이 다소에서 그리스도인을 잡아 가둘 때 “남자와 여자“를 끌어다가 옥에 가두었다. 여자들도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18장 26절에 브리스길라는 남편보다 더 적극적으로 아볼로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또한 바울이 로마 교회 사역자들에게 문안하는 로마서 16장을 보면 28명의 사역자 중에 여성 사역자들이 10명이나 된다. 1/3이 넘는다. 뵈뵈(1절), 브리스길라(3절), 마리아(6절), 유니아(7절), 드루배나와 드루보사(12절), 버시(12절), 루포의 어머니(13절), 율리아(15절), 네레오의 자매(15절) 등 10명의 여성 사역자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문안하라고 부탁하신다. 이들은 단순히 봉사자가 아니라 복음 사역에 앞장 선 여성 사역자들이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고 말씀한다. 디모데는 바로 그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로부터 배운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의 회에서 안수를 받은 것은 남자로서의 디모데였다. 따라서 목사 차원의 강도권은 부여되지 않지만 여성들도 당회의 결정에 따라 교육권을 부여받을 수 있고 각자의 은사를 따라 사역할 수도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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