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사적지 지정을 앞둔 교회들] ⑮ 익산 서두교회
[역사기획/ 사적지 지정을 앞둔 교회들] ⑮ 익산 서두교회
  • 정재영 기자
  • 승인 2019.07.09 10: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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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신앙 고백, 긍지의 복음전선 구축하다

초기부터 왕성한 신앙 열정 바탕 공동체 이끌어 … 삼신학교 세워 민족교육 강화

익산시 삼기면 서두리는 불교 영향력이 몹시 강력한 지역이다. 이런 동네에 120년 전 복음이 들어와 자리 잡고, 오늘날까지 막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익산 서두교회의 역사는 본인들 뿐 아니라 이웃교회들과 지역사회 모두의 자랑거리다. 사진은 서두교회 예배당 전경.
익산 서두교회의 역사는 본인들 뿐 아니라 이웃교회들과 지역사회 모두의 자랑거리다. 사진은 서두교회 예배당 전경.

서두교회(박상철 목사)의 설립은 1898년 11월에 이루어졌다. 이 마을에 살던 정정보가 전주에 나갔다가 마침 노방전도 중이던 미국남장로교 전주선교부 소속 테이트(한국명 최의덕)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정정보는 족히 80리는 넘는 길을 걸어 테이트 선교사가 사역하는 전주서문교회까지 다니며 신앙을 키웠고, 현 원서두마을 자리에 기도처를 마련해 교회의 기초를 다졌다. 그를 도와 서두교회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목포선교부에서 전주선교부로 옮겨온 맥커친(한국명 마로덕) 선교사였다.

서두교회 초대 당회장인 마로덕 선교사와 초대 장로인 김성환 장로 부부의 모습.
서두교회 초대 당회장인 마로덕 선교사와 초대 장로인 김성환 장로 부부의 모습.

맥커친은 1902년 청년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기까지, 전북지역의 동서남북을 오가며 무려 80여 교회를 세운 인물이다. 왕성한 복음의 열정으로 익산 북부지역에서 전도 열매를 거두며 1903년 정식 설립한 서두교회의 초대 당회장이 된다.

서두교회는 초창기부터 착실한 신앙고백 위에 공동체를 구축했다. 문답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았고, 어긋난 행위에 대해서는 책벌도 마다하지 않았다. 신입 교인들은 이렇게 철저한 검증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정식 세례교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서두교회 창고에 보관된 옛 강대상과 오르간 등은 역사관 건립 후 전시물로 빛을 볼 날을 기다린다.
서두교회 창고에 보관된 옛 강대상과 오르간 등은 역사관 건립 후 전시물로 빛을 볼 날을 기다린다.

초창기 교우들이 바른 신앙의 길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조차 마다하지 않았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 1대 장로이자 전도사로도 서두교회를 섬겼던 김성환 장로와 그 뒤를 이은 박병열 최병수 장로 등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끝까지 저항하다 옥고를 치른 인물들이었으며, 특히 박병열 장로는 결국 영광스러운 순교의 길을 걷는 주인공이 되었다.

한편으로 서두교회는 마로덕 선교사로부터 물려받은 전도의 열심을 발휘해 빠른 속도로 교세를 키웠으며, 인근 지역에 분립과 개척의 형태로 많은 교회들을 세워나갔다. 1936년 낭산면의 용기교회를 시작으로 삼기면의 세광교회, 황등면의 황등서부교회 등이 서두교회를 뿌리로 설립됐다. 나아가 이들을 통해 또 다른 교회들이 일어나며 익산 땅에 거대한 복음전선을 구축했다.

삼신학교도 서두교회에게는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이다. 1922년 이 지역에는 사립 삼광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일제강점기 가난한 농민들의 자녀가 비싼 학비를 내고 다닐 수 있는 시설이 아니었다. 이들을 위해 김성환 장로와 제직들이 뜻을 모아 연 학교가 삼신학교였다.

기독교교육과 일반교육을 함께 실시한 삼신학교는 특히 각급 학교가 일본어를 전용하던 시대적 환경 속에서 학생들이 우리말을 자유롭게 쓰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예배당 신축 당시 공사자재로 쓰인 모래를 퍼 나르던 학생들.
예배당 신축 당시 공사자재로 쓰인 모래를 퍼 나르던 학생들.

암울했던 시절이 끝나고 조국 해방을 맞이하자 서두교회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교회당 건축이었다. 아홉 칸짜리 협소한 초가 예배당을 벗어나 33평짜리 서양식 예배당을 짓는데 온 교회가 힘을 모았다. 이후 서두교회는 안정된 성장기를 구가한다.

조옥룡 이영천 목사의 뒤를 이어 서두교회 강단을 지킨 이봉기 목사, 김성환 장로의 아들 김종은 목사 등이 교단 총회장을 역임하는 경사도 있었다.

문승록 목사가 담임하던 시절인 1998년에 설립 100주년을 맞이해서는 몽골에 에르덴솜교회와 초이르교회를 기념교회로 개척했으며, 김동규 장로가 발간위원장이 되어 <서두교회 100년사>를 발간했다.

그로부터 20년 세월이 더 흐른 지금 서두교회의 뜰에는 박병열 장로의 순교기념비가 건재하고, 초창기부터 현재까지의 교회 역사들을 보여주는 여러 사진들이 예배당 곳곳을 채우고 있다. 전북지역 3·1운동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등 서두교회의 역사는 교회들 뿐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의 긍지로 여겨진다.

서두교회의 오랜 역사와 순교사적을 발굴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김영식 장로는 “초대 김성환 장로의 아들인 김종철 장로가 원로장로로서 지금도 교회를 지키는 등 믿음의 세대계승이 잘 이루어져온 것이 우리 교회의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밝혔다.

김 장로의 자랑처럼 서두교회에서는 80대 은퇴권사부터 갓 중학교 입학한 어린 학생까지 함께 찬양대를 이루고 예배한다. 가르침과 배움이, 섬김과 헌신이 대를 이어 계속되는 공동체. 서두교회의 시간은 앞으로도 그런 이야기들로 채워질 것이다.

서두교회의 순교자 박병열 장로

애국신앙으로 끝까지 항거
신사참배 적극 반대 … 순례기념비 건립

익산시 삼기면에서 태어난 박병열은 한의사 집안의 장남이었다. 황제의 단발령까지 거부하고 지낼 만큼 철저한 유교문화 속에서 자라온 그에게 기독교는 낯설고 위험한 사상이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 최하락으로부터 여러 차례 전도를 받았어도 그는 완강히 거부했다.

순교자 박병열 장로의 모습과 그의 행적을 기리는 순교기념비.
순교자 박병열 장로의 모습과 그의 행적을 기리는 순교기념비.

한번은 친구가 하도 집요하게 교회 나가자고 강권을 하자 박병열은 홧김에 그만 손에 들고 있던 농기구로 그를 내리쳤다. 하지만 피투성이가 된 몰골로도 전도를 멈추지 않고,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최하락의 성심은 결국 박병열의 바위 같던 마음을 움직였다. 드디어 결심이 선 박병열은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서두교회로 찾아갔다.

당시 서두교회를 담임하던 마로덕 선교사는 처음 만난 박병열에게서 남다른 결기를 느끼고, 그를 전주의 달성경학교로 보낸다. 거기서 선교사들로부터 성경 속 깊은 진리들을 깨달은 박병열은 매서인의 직임을 받는다. 여러 동네를 순회하며 성경을 전하고 판매하는 일을 맡아 복음의 동역자로 섬기게 된 것이다.

3·1운동이 벌어졌을 때는 기독교인들이 주도한 익산지역 만세운동에 동참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이후 교회 영수로 활동하던 중 1935년 5월 서두교회 제2대 장로로 임직한 일은 그의 사명감과 헌신의 의지를 더욱 불태우는 계기가 됐다. 당시에 이미 나이 53세에 이르렀지만 만세운동 당시의 열정은 청년 때와 다름없었다. 그가 섬기는 서두교회 역시도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나 총회의 압력 앞에 굴하지 않았다.

결국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된 그는 삼기주재소와 이리경찰서로 옮겨가며 여러 차례 모진 심문을 당했다. 고초를 당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당당히 신사참배 반대를 외치는 그에게 더욱 혹독한 고문이 자행됐다. 빈사상태가 되어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그는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1940년 9월 22일 하나님 품으로 갔다.

그의 영적인 아버지 마로덕 선교사의 집례와 모든 교우들의 애도 속에 장례식이 거행됐다. 그가 조국의 독립과 겨레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던 미륵산에는 후배 신앙인들에 의해 엘리사기도원이 세워졌다. 1982년 건립된 기도원 설립기념비에는 박병열 장로의 순교행적이 함께 새겨졌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서두교회는 이 기념비를 교회 앞마당으로 옮겨오고, 1986년에는 그 곁에 정식으로 박병열 장로의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전주동부교회 박판태 장로 등 후손들과 그의 행적을 기억하는 여러 교회들이 함께 건립한 이 기념비에는 신앙과 애국의 마음으로 최후까지 항거한 고인을 기리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의 행적은 서두교회, 나아가 익산지역 교회들의 자랑이며, 총회의 긍지이다. 제104회 총회에는 박병열 장로를 총회순교자명부에 등재해 달라는 안건이 상정된다.

“역사 자산, 보존·계승 힘쓸 터”

120년 시간 속에서 다져온 영적 공동체의 탄탄함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는 서두교회 박상철 목사.
120년 시간 속에서 다져온 영적 공동체의 탄탄함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는 서두교회 박상철 목사.

인터뷰/ 박상철 목사

“121년의 장구한 역사를 보냈지만 서두교회는 여전히 영적인 능력이 넘치는 교회, 열심히 기도하는 교회로 소문나 있습니다. 온갖 풍파 속에서도 끝까지 버티며 믿음의 승리를 보여준 선배들의 전통을 저희는 이렇게 계승하고 있습니다.”

서두교회 박상철 목사에게는 주일이나 수요일이 아닌 평일에도 하루 두 차례씩의 집회가 기다린다. 새벽예배 뿐 아니라 매일 밤 기도회가 거르지 않고 진행되기 때문이다. ‘모이는 교회’를 통해 얻는 힘으로 세상을 이기도록 성도들을 돕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박 목사는 믿는다. 또한 그만큼 서두교회의 신앙적·역사적 가치를 드러내고 계승하는 작업도 소중히 여긴다.

“120년간 서두교회를 주축으로 이어온 익산 북부의 교회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역사관 건립을 추진 중입니다. 구 예배당을 활용하는 방안과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는 방안을 두루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역사자료 수집은 물론이고, 물려받은 옛 비품들을 보존하는 데도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박 목사의 설명처럼 서두교회에게 역사란 가장 중요한 자산이자 성도들을 뭉치게 하는 힘이다. 이를 기반으로 올해 3·1절 100주년을 맞아 총회로부터 만세운동 참여교회로 지정을 받은 데 이어, 역사위원회로부터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을 위한 심사를 받기도 했다.

올 가을 총회에서 통과되면 그 동안 미뤄왔던 교회설립 120주년 예배와 겸하여 기념행사를 치를 예정이다. 서두교회의 역사사적지 지정은 소속된 군산남노회(노회장:이판용 목사) 그리고 익산지역 전체로도 처음 이어서 몹시 큰 경사가 될 것이다.

“3·1운동에 앞장서고,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바른 신앙을 지켜온 서두교회의 역사를 손님들에게 제대로 보여드릴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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