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사적지 지정 앞둔 총회 신앙유산] ⑳ 대구 범어교회
[역사기획/ 사적지 지정 앞둔 총회 신앙유산] ⑳ 대구 범어교회
  • 정재영 기자
  • 승인 2019.08.27 11: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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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복’ 이 땅에 나누는 사명 멈추지 않았다
순박한 농촌마을 공동체에서 출발, 아름다운 믿음 열매 쌓으며 선한 영향력교회로 성장

현직 국무총리의 축하영상이 교회로 도착했다. 따로 부탁한 적이 없는데, 총리실에서 먼저 자발적으로 보내온 것이었다. 덕택에 대구 범어교회(장영일 목사) 헌당식에 풍성한 이야깃거리 하나가 더해졌다. 사연은 1950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긍휼의 공동체로 113년의 시간을 보낸 대구 범어교회의 예배당 전경.
긍휼의 공동체로 113년의 시간을 보낸 대구 범어교회의 예배당 전경.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민들의 발길은 낙동강 전선 쪽으로 이어졌다. 부산은 물론이고 대구에도 수많은 피난민들이 몰렸다. 시내 어디에서든 먹을거리와 잠자리가 필요한 이들이 떼지어있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춘천에서 내려온 15세 소년도 그 중 하나였다. 대구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소년의 가족들은 굶주림에 지쳐있었다. 가엾은 그들에게 손을 내민 것은 범어교회의 한 성도였다. 그의 배려 덕분에 가족들은 숙식을 해결하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 소년은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에 입학했고, 교수 국회의원 장관직을 거쳐 대한민국 제39대 국무총리에까지 올랐다.

이 인물의 이름은 한승수이다. 성장한 후에도 그의 뇌리에는 자신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 피난처가 되어준 ‘범어교회’의 이름이 남아있었다. 2009년 범어교회 100주년 기념예배당 헌당식에 깜짝 축하영상이 날아온 배경은 이러했다.

범어교회 옛 예배당 모습을 재현한 미니어처들.
범어교회 옛 예배당 모습을 재현한 미니어처들.

범어교회 성도들은 6·25 당시 이처럼 자신의 집을 아낌없이 피난민들을 위해 내어주었다. 전쟁으로 누군가 목숨을 잃고, 가족과 헤어지는 아픔들을 겪는 상황에서도 긍휼을 잃지 않았다. 3대 장로인 정운한 장로의 경우에는 초대 군종감을 지낸 김형도 목사와 2대 군종감 황금천 목사를 위해 자신의 별채를 내준 사례가 범어교회 100년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100년사에는 ‘착한 사마리아인’을 닮은 범어교회의 이야기들이 무궁무진하다. 장영일 목사는 그 배경에 “순박한 시골 농심(農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복음을 만나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장 목사의 설명처럼 범어교회는 옛 달성군 수성면의 농촌마을에서 출발한 공동체이다. 지금이야 범어동이 대구의 중심지 중 하나로 변모했지만, 예전에는 변두리의 작은 동네에 불과했다. 그리고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 동네에 살고 있었다.

강릉 유씨댁 안방마님인 박순이, 그의 조카며느리인 배양이, 그리고 한 동네에서 절친하게 지낸 조달숙은 1903년경 함께 사월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다. 거기서 놀라운 복음을 들었고, 감동을 받아 예수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이후 세 여인은 대구 시내의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까지 걸어서 다니며 예배에 참석하고 믿음을 키웠다.

범어교회 교적부.
범어교회 교적부.

2년 후부터는 같은 동네 정일수의 집에서 기도모임을 시작했고, 다시 이듬해 여섯 칸짜리 초가 예배당을 마련하면서부터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를 기반으로 1906년 9월 9일 드디어 범어교회가 설립된다. 대구제일교회의 ‘교회역사’에는 당시 설립자가 안의와 선교사로 명시되었으며, 영수 유병기와 집사 배종호 등의 이름도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어머니들에게서 믿음을 물려받은 자녀들은 곧바로 주축을 이루며 범어교회 초창기 역사를 이끌어갔다. 박순이의 아들 유병기는 영수이자 초대 장로로, 조달숙의 아들 정운한과 손자 다섯 형제들도 모두 역대 장로들로 헌신적인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자생교회가 지니는 자발성에 선교사들의 조력까지 더해지며 범어교회는 일취월장 자라났다.

설립 10년만인 1916년 첫 예배당 건축이 이루어지고, 그로부터 2년 후에는 당회가 조직되며 교세가 점점 성장한다. 1953년에는 수성교회를 분립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민족혼을 일깨우는가 하면, 해방 후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 유경렬 피택장로가 피살되는 아픔 등을 극복하면서 꿋꿋이 역사를 이어왔다.

범어교회 교적부. ⑤1950년대 범어교회 주일학교 수료증서.
1950년대 범어교회 주일학교 수료증서.

시련기가 지나자 부흥기가 찾아왔다. 1980년대에 전도를 통한 큰 부흥과 영적 각성이 이루어지면서 범어교회는 1000명이 넘는 성도들이 출석하는 공동체가 됐고,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계 안팎에 큰 영향력을 끼치며 점점 존재감을 드러냈다.

많은 변화들이 지나갔지만 여전한 모습도 있다. 초창기 범어교회 기틀을 세웠던 인물들의 후손이 영적 ‘토박이’로서 지금까지 충실하게 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점,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교회로서의 면모를 아직도 유지하는 중이라는 점 등이다.

현재의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부채가 상당 부분 남아있는 상태에서, 과감하게 기존 예배당 매각 대금의 1/10을 봉사와 선교의 목적으로 기부하며 사회에 환원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의료분야에 종사하는 80여 성도들을 중심으로 해마다 국내외 의료선교사역을 전개하는 등 교회와 세상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갖가지 사역들이 범어교회의 오늘을 더욱 풍성케 한다.

범어교회의 유구한 세월을 간추려 소개하는 역사관 내부 모습.
범어교회의 유구한 세월을 간추려 소개하는 역사관 내부 모습.

교회당 지하층에 마련된 역사관과 특별전시실에는 그 장구한 세월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전시물들이 알뜰하게 갖춰져 있다. 이곳에서 초창기 예배당 모습을 재현한 미니어처와 당시 예배모습을 묘사한 상상도 등을 살펴보노라면, 여린 순처럼 소박하게 시작한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엄청난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범어예배당 어제와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꾸민 특별전시실의 기다란 벽면은 꼭대기까지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의 말씀들로 채워져 있다. 하늘의 복을 이 땅에 전하고 나누는 범어교회의 사명은 멈추거나 물러나는 법을 모른다.

“건강한 영적 전통 계승 힘쓸 터”
말씀에 대한 순전한 신뢰가 교회 지켜와

인터뷰/ 장영일 목사

범어교회 장영일 목사는 건강한 영적 전통의 계승을 가장 큰 과제로 여긴다.
범어교회 장영일 목사는 건강한 영적 전통의 계승을 가장 큰 과제로 여긴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항시 좌우명처럼 여기고, 행동으로 옮기며 자라온 교회입니다.”

장영일 목사는 범어교회의 113년 역사를 이렇게 요약한다. 언제나 부지런하고, 꾸준한 사역으로 지역사회가 의지하는 정신적 보루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데는 말씀에 대한 순전한 신뢰와 순종이라는 바탕이 크게 작용했다는 설명이다.
“시대를 관통해 항상 구원의 방주로서 제 역할을 감당하도록 교회를 이끌고 섬긴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목회하는 내내 범어교회의 건강한 영적 전통과 이를 훌륭히 계승해온 교우들의 저력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장 목사는 범어교회에서 개인적으로 겪은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을 교인수가 1000명에서 2000명으로 급격히 늘어나던 부임 10년차 무렵으로 추억한다. 역설적이지만 장 목사 본인에게는 사역의 존폐를 고민할 정도로 심각한 시기였다고 한다.

“이들을 어떻게 한 공동체로 묶어야 하나, 앞으로 어떻게 사역을 펼쳐나가야 하느냐는 염려에 솔직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해답은 제자훈련에서 발견했습니다. 목사의 제자가 아닌 예수의 제자로 키우겠다는 다짐으로 교우들을 설득하고 훈련시키며, 새로운 체제를 안착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가 목회비전으로 제시한 예루살렘의 꿈(예배공동체) 나사렛의 꿈(양육공동체) 갈릴리의 꿈(제자공동체) 사마리아의 꿈(평화공동체) 안디옥의 꿈(선교공동체) 로마의 꿈(희망공동체)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든든한 기성세대, 탁월한 다음세대가 앞으로도 이 비전을 이어갈 수 있도록 장 목사는 혼신을 다할 것이라고 각오를 보여줬다.

범어교회 어제와 오늘 이끈 지도자들

범어교회 역대교역자.
범어교회 역대교역자.

범어교회 113년에는 각 시기마다 시대와 현실을 지탱해 준 영적 지도자들이 있었다. 서로의 색깔은 달랐지만 그들 각자가 발휘한 재능과 열심들이 켜켜이 쌓여 오늘의 범어교회를 가능케 했다.

대구선교의 선구자인 안의와 선교사에 이어 범어교회를 담임한 선교사들 중에는 허버트 블레어(한국명 방혜법)와 헨리 부르언(한국명 부해리) 선교사가 있다. 두 선교사는 대구 경북 일대를 순회하며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대구YMCA의 전신인 교남기독청년회를 창립하는 등 기독교 사회참여에도 공헌한 인물들이다.
선교사들을 도와 초창기 범어교회를 섬긴 한국인 사역자들 중에는 경북지역에서 최초로 복음을 접한 장로교인 김기원, 제17회 조선장로교 총회장을 지낸 염봉남, 대구경북지역 3·1운동에 앞장선 정재순 박인서 등이 있다. 이들을 통해 타협하지 않는 말씀 중심의 신앙이 형성됐다.

한복차림으로 복음을 선포하며 애국신앙을 실천하는 모습이 성도들의 마음속에 각인된 박재원 목사, 학자의 모습을 견지하며 훗날 민중신학의 거두로 활동한 서남동 목사, 부흥사로 명성을 떨친 양찬언 목사 등도 범어교회의 강단을 거쳐갔다.

1964년 부임한 설명도 목사는 22년간 시무하며 범어교회의 강단을 안정시킨 동시에 대부흥기를 연 목회자였다. 꾸준한 전도사역을 통해 첫 교인수 1000명 돌파, 선교사 파송, 선교원 개원 등의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안타깝게도 설 목사는 1986년 교회 설립 80주년 기념행사들을 치르던 중에 갑자기 숨지며, 오늘날까지 교우들에게 안타까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들의 뒤를 이은 장영일 목사는 제6대 위임목사로 25년째 범어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제자훈련 도입을 통한 평신도 리더 양성, 100주년 기념예배당 건축과 함께 범어4동 시대의 개막으로 변모하는 목회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큰 열매들을 거두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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